차밭에는 싱그러운 향기가 가득합니다. 새벽 안개 속에 서서히 깨어나는 찻잎에서 신선한 기운이 솟아오릅니다. 온갖 새들의 합창이 함께하는 아침 차밭 길을 걷노라면 어느덧 선정삼매(禪定三昧)에 노닐게 됩니다. 밖으로 나타나는 대상에 물들지 않으면 언제나 그윽한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도의 국사는 신라말 당나라에 건너가서 37년간 수행하다가 마조선사의 제자인 서당지장선사에게 법을 받았습니다. 귀국길에 백장선사를 찾아 뵙고 더욱 선지를 인정받아 마침내 중국의 선법이 모두 동국으로 간다라는 찬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시절인연이 이르지 못함을 알고 설악산 진전사에 은거하시며 염거선사에게 법을 전하고 마침내 보조체증이 가지산문(迦智山門)을 융성하게 하였으니 이것이 한국 선불교의 시작입니다. 보림사 차의 역사는 위와 같이 선불교의 역사와 더불어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당나라에 유행하던 차는 전차로 선사들이 귀국하면서 같이 들여왔던 것입니다,

한편, 체증선사의 창성탑비에는 우리나라 금석문 최초로 헌안왕이 약과 차를 체증선사에게 보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유구한 선과 차의 역사를 바탕으로 해마다 보림사에서는 선차 축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차는 수행자들에게 있어 떨어질 수 없는 유일한 벗입니다. 화두 참구의 치열함 속에서 상기를 다스리고 혼침(마음이 흐리멍덩해짐)을 깨우며 정신을 맑게 합니다. 또한 맑은 샘에서 찻물을 기르고 물이 끓는 소리를 들으며 차를 우려내어 향기를 듣습니다. 한편 색깔을 보면서 대상을 따르지 않고 오로지 목전에 현전(現傳)하는 역역(繹繹)한 성품을 반조(反照)하는 반야행(般若行)을 실천하면 바로 깨달음의 기연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선차일여(禪茶一如)의 경계입니다. 하지만 요즈음 차인들은 차를 마시면서 반야행을 실천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차를 모르는 사람들보다도 시끄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맑은 차 한잔을 손에 쥐면 마치 부처님을 받들어 모시는 듯 자연스럽게 이마 위에 정대하게 됩니다. 이처럼 차 한잔을 바르게 마시는 일이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닙니다. 차의 성품이 곧 불성으로 한잔의 차는 곧 한 조각 성품의 나타남이며, 한 조각 성품은 한 잔의 차로 잠기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함허득통선사는 성품과 차를 불이(不二)의 관점에서 보았습니다.

차를 마시는 사람은 차를 마시는 행위를 통해서 나타나는 일체 대상을 불이의 관점에 놓고 끝없이 반야행을 실천하다가 보면 어느덧 깨침의 기연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선원에서 보청으로 차를 따서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 선원에서는 요즈음 차를 멀리하고 오히려 커피가 유행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차는 들뜬 심성을 가라앉히고 혼침을 벗어나게 하지만 커피는 오히려 진한 향과 달콤한 맛으로 감각을 자극하여 수행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차인들이 가장 바쁜 시기입니다. 차가 나오는 계절이라서 차 행사에 참여하고 만드느라 밤낮이 따로 없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걱정이 됩니다. 자칫하면 차에 대한 욕심으로 수행하는 마음을 놓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차를 손수 덖으면서 느끼는 것은 차와 한 몸이 되는 것이 쉽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차는 뜨거운 가마솥에서 온전히 자신을 죽여 향기로운 몸으로 거듭나지만 아직도 관념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싱그러운 차의 계절에 온전히 죽어 다시 살아나는 차처럼 대사대활(大死大活)의 경계를 획득하여 모든 이웃들의 갈증을 풀어주고 싶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그윽한 차나 한 잔 올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