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장마가 시작되면서 목마른 숲에는 기다리던 단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선원 뜰 앞에는 층층이 오른 하얀 접시꽃이 백의관음(白衣觀音)처럼 말 없는 설법을 하고 있습니다. 자비심이야말로 수행의 근본이니 모든 생명을 자신의 몸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을 발해야 합니다.

신도님들과 함께 다시 팽목항에 다녀왔습니다. 이전에 갔을 때보다 쓸쓸했습니다. 하지만 진도 실내체육관에 마련된 임시 천막법당에서는 아침을 여느라 바빴습니다. 비구니 스님은 참사 이래로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가족들과 동고동락하며 보살행(菩薩行)을 실천하고 있어 감사한 마음뿐이었습니다. 가지고 간 공양물을 내려놓고 아직 열한 명의 실종자가 가족 품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팽목항으로 향했습니다. 마침 찾아온 도반 스님, 그리고 신도님과 함께 고통을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에 다시 현장을 찾아갔습니다. 열한 명의 실종자들이 어둡고 깊은 바다 속에서 어서 빨리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관세음보살의 자비 광명이 아직 남아있는 실종자들을 빛으로 인도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오늘처럼 신도님들과 고통의 현장을 직접 찾아가서 기도를 올리게 되면 간절함과 자비심이 더욱 깊어지고, 세상이 그대로 법당이 되어 신심이 더욱 고취됨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의 삶은 마치 저 깊고 어두운 바다처럼 한치 앞을 내다볼 수가 없습니다. 탐진치(貪瞋痴) 독심(三毒) 의 그물에 갇혀서 헤매고 있기 때문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중생이 고통의 현장에서 부르면 언제나 찾아가서 해결해 주시겠다고 원력(願力)을 세우신 자비로운 어머니입니다. 그러므로 인생 고해를 살아가려면 관세음의 지혜와 자비의 배에 의지해야 합니다. 하지만 간절히 원하고 부르지 않으면 물가에는 함께 가더라도 물을 먹지 않는 소처럼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세월호가 침몰했을 때 온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승객들을 버리고 도망쳐 나온 승무원들의 무자비함에 모두가 가슴 아파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동체대비심이라는 공동체의식이 없게 되면 자기만 해탈하겠다는 이기심을 성취하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모든 이웃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겠다는 대자비심으로 수행의 입지를 세워야 합니다. 사람이 본래 관세음이라는 믿음은 인간에 대한 최대의 존엄이며 가치이기 때문에, 자비심으로 충만하면 이기심이 사라지고 비로소 수행의 관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비록 번뇌가 끝이 없고 중생의 고통이 한량없지만 고통의 근본인 오온(五蘊)을 자세히 비추어보면 자성이 본래 없어 텅비어 있기 때문에 일체 고통이 사라집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가피(加被)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현장에서 고통이 닥쳐오면 두려워하거나 회피하지 말고 바로 알아차리고 관세음의 명호를 부르면 자비심으로 충만해 ‘너와 내가 본래 둘이 아니다’라는 공동체의식인 동체대비심이 일어납니다.

이와 같이 세상의 고통이란 바로 보면 좋고 나쁜 것이 아니라 수행의 원동력이 되어 공동체의식을 불러 일으킵니다. 또한 깨달음의 근본인 발심이 일어납니다. 다만 두려운 것은 세월호에 희생된 귀중한 생명들을 잊어버리고 수행을 게을리하여 자기 혁신과 이웃들의 아픔을 외면하고 또 다른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을까하는 것입니다.



백의 관음 말없이 설하시고/ 남순동자 들은바 없이 들으시네/ 꽃병위에 버들가지 한결같이 여름이고/ 바위 앞에 푸른 대나무 언제나 봄이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