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위와 휴가철을 맞아 우리 법원에서 7월 말부터 2주간 가졌던 여름 휴정기가 지나갔다. 법원의 휴정기라고 해봐야 재판일정만 없을 뿐 판사들에게는 평소 신경 쓸 여력이 없어 캐비닛 한구석에 모셔두었던 어렵고 복잡한 사건기록을 큰맘 먹고 꺼내 차분하게 검토하라고 주어진 시기이기도 하고, 당장 재판이 없다고 해서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므로 그 기간에 마냥 손 놓고 쉬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긴장의 연속인 재판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여유를 가질 수 있고 미뤄두었던 휴가를 통해 지친 심신을 달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음은 틀림없다.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았던 휴정기가 끝나자 아쉬움도 잠시, 법원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분주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사이 몇 차례의 비와 함께 무더위는 기세가 꺾였고, 어느덧 아침저녁으로 날씨가 제법 선선해졌다. 한낮의 매미 울음은 점점 잦아들고, 대신 야밤의 풀벌레 소리가 반갑게 들려온다. 게다가 절기상으로도 모기 입이 삐뚤어진다는 처서(處暑)가 지났고, 예년에 비해 이른 추석도 코앞으로 다가왔으니 이제 얼마 남지 않은 8월과 함께 여름을 떠나보내고 슬슬 가을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듯하다. 이 무렵이 한해 농사의 성패를 결정하는 중요한 시기라고 하던데, 비단 농사뿐만 아니라 각자가 기대하는 늦가을의 풍성한 수확을 위해서는 무더위와 휴가로 느슨해진 몸과 마음을 추슬러 심기일전하고, 그간 벌여놓은 일들을 잘 거둬들여 결실로 이어지도록 신경 써야 할 시기가 아닌가 싶다.

몇몇 호기로운 계획과 다짐으로 2014년을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한해의 3분의 2가 지나고 계절도 여러 번 바뀌어 가을로 접어들다니 시간이 참 빨리도 지나감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흔히들 느끼는 특별할 것 없는 일인가 싶다가도 한편으로는 내가 몸담고 있는 법원의 시곗바늘이 유난히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쉴 새 없이 몰려드는 사건을 제때 처리하기 위해 일주일 단위로 짜인 빡빡한 재판일정에 맞춰 움직이므로 멀리 내다볼 여유를 갖기 어려운데다가 매번 사건이 바뀌어도 처리 과정은 크게 다를 바 없어 쳇바퀴 도는 다람쥐 마냥 항상 같은 자리에서 비슷한 업무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사건이 주는 무게감과 처리에 대한 압박감에 나도 모르게 조금씩 생기는 조급증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마음이 앞선 채 일만 쫓다 보면 어느새 일주일, 한 달이 훌쩍 지나가 있어 가끔은 당혹스럽기도 하다.

물론 주어진 일에 충실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나치게 일에만 갇혀 좁은 시야로 사건을 바라보게 되면 자칫 코끼리를 더듬는 장님 꼴이 되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올바른 판단의 전제가 되는 사안의 본질 파악은 경우에 따라서 기록에 드러나지 않는 사정에 대한 고려까지 필요로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에 대한 이해와 세상을 보는 안목을 함께 갖추도록 노력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사건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일만 열심히 해도 저절로 생기는 것이라면 모르되, 그렇지 않다면 기록 밖 세상에 대한 관심과 공부도 게을리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올해 처음으로 변론을 여는 단독재판을 맡아 사건처리에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던 중 휴정기를 맞아 맞닥뜨린 이 설익은 위기의식도 다시 몰려드는 사건에 떠밀려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당분간은 당장 발등의 불을 끄는데 매진해야겠지만 그러면서도 거기에 매몰되지 않도록 중심을 잘 잡아야겠다. 그러다 보면 다음 휴정기에는 더 깊은 고민과 함께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