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했는데 아침부터 직원 표정이 묘하다. 방금 전 사무실로 파산자 우편물이 왔는데 소포처럼 두껍다면서 함께 열어보자고 한다. 개봉해 보니 유명 백화점에서 보내 온 롤렉스 카탈로그다. “워메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고퀄’이네.” 영롱한 빛이 나는 시계에 빠져들면서 인쇄한 곳을 살펴보니 머나먼 스위스에서 만들어져 비행기로 날라 온 홍보물이다. 카탈로그를 뒤적일수록 직원과 변호사의 표정은 어두워진다.

우편물 주인이 정말로 파산을 신청한 사람 맞나 싶다.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파산관재인은 파산절차 진행 중 일시적으로 채무자의 모든 재산을 관리하는데, 주요 우편물도 촉탁을 통해 사무실에서 받을 수 있다. 휴대전화에 시계 기능이 들어온 이래로 시계를 차 본 적인 없는 필자지만 제대로 만들어진 명품 카탈로그를 본 충격은 상당했다. 하지만, 한 때 잘나가던 사람도 결국 파산하는 걸 보면,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은 결코 틀린 말은 아니다.

인류 역사 초기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빚을 갚지 못하는 채무자는 범죄자와 같은 취급을 받거나 노예로 삼았다. 그러다 중세 이후 유럽에서 바다를 통한 해외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배가 들어오지 못해 파산한 이들을 구제하기 위한 제도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해외무역의 성격상 성공하면 큰 이득을 남기지만 실패할 확률이 더 높은 데, 실패한 투자자를 범죄자 취급하면 누구도 도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배경에서다.

파산관재인으로서 배운 점이 몇 가지 있다. 통계적으로 의미 있다고 할 수 없으나, 사업하다 실패하거나 보증을 잘못 서서 빚을 진 이처럼 인생에 있어 한 때나마 잘 나갔던 사람보다 아예 처음부터 어려운 경제생활로 시작하여 시종일관 어렵게 생활한 이들이 더 많은 것 같아 안타까운 심정이다.

파산자의 절반 이상은 오랜 기간 가족과 떨어져 생활하거나 이혼하는 등 가정생활이 평탄치 아니한 경우가 많다. 파산자들을 보면 건강이 나쁜 경우도 상당한데, 어려운 경제 생활을 하는 이들은 고령이거나 장애를 가져 일용 근로조차 못한 처지에 놓여 있다.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파산채무자의 유형도 빈익빈 부익부이다. 몇 십억원씩 빚진 이도 있지만, 2000만원에서 3000만원대의 채무자도 있다. 시골에서 더 이상 일을 하기 힘든 80대 부부가 자식들에게 빚을 남기지 않기 위해 신청한 경우에는 난감하다. 채무자의 자식들이 잘 살면 잘사는 대로 한숨이 나오고, 못 살면 못사는 대로 한숨이 난다. 싼 게 비지떡이라고 시중에 넘쳐나는 회생이나 파산 광고를 보고 불성실한 신청대리 사무실을 이용했다가 제대로 도움조차 받지 못한 채 불이익을 받는 경우도 많다.

조사하다 보면 미운 채무자도 발견된다. 남의 돈으로만 사업해서인지 처음부터 빚 갚을 생각이 전혀 없는 사람이 그렇고, 재산을 숨긴 것이 뻔히 보이는데 거짓말하는 사람도 면책 결정을 받기 힘들다. 씀씀이를 줄이지 못하는 사람은 뭐 하러 파산을 신청했는지 애잔한 마음마저 든다.

평범한 독자들은 육체적·정신적 건강에 관심을 가지고, 가정에 화목하고 보증도 안 선다면 파산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확 줄어들 터다. 롤렉스 카탈로그 채무자에게 며칠 뒤 명품 화장품 카탈로그가 배달됐다. 함께 배달 온 사채업자의 협박 아닌 우편물을 보고 부러운 마음은 쏙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