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초등학생 아들이 일기 쓰는 것을 도와주었습니다. 아들은 엄마의 명령으로 무려 4일치의 일기를 몰아 써야 하는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아들에게 변신 자동차를 사준 것도 시간이 좀 지나 약발이 떨어진 상태라 이참에 점수를 따볼 생각으로 집사람한테 “오늘부터 잘 쓰면 되지 지난 일기까지 한꺼번에 쓸 필요 있겠느냐”고 건의하였더니, 집 사람은 “매일 쓰라는 것은 아닌데 그 동안 계속 안써서 이번에는 그렇게 하기로 아들과 이야기를 했다”고 하더군요. 법적으로 해석하면 ‘과잉금지(過剩禁止)의 원칙에 반하지 않고, 당사자의 동의도 있었다’는 취지로서 저와 아들은 더 이상 저항하지 못하고 4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함께 기억을 더듬어 보았습니다.

어린이들이 방학일기 때문에 고생하는 것은 수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는 듯합니다. 방학 숙제에서 일기쓰기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이유가 아이들을 괴롭히기 위한 것은 아니겠지요. 사실 일기는 자신을 뒤돌아보는 작업으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인 일 중 하나이고, 일부 비판론도 있습니다만 교육적으로 많은 유익이 있다고 합니다.

한편, 최근 심리학, 경제학계 등에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어떠한 선택에 이르게 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합리적인 이성이나 도덕관념이 아니라 동물적인 욕구나 감정 또는 원시시대 때부터 형성된 ‘투쟁-도피 반응’(fight-flight reaction·스트레스를 유발하는 대상에 대해서 맞서 싸우거나 회피토록 준비하는 각성 반응)이라는 연구 결과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실제로 일부 형사사건에서는 위 점이 적나라하게 나타나기도 하는데, 특히 작년 세월호 사건 때 선장, 기관사 등 승무원들이 승객들에 대한 구조의무를 방기한 채 일사분란하게 도주하는 모습은 투쟁-도피 반응 앞에서 직업윤리가 얼마나 무력할 수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향성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수년 전 서울에서 있었던 유명한 ‘왕따’ 연구가 이 문제에 대하여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연구는 심하게 왕따 당하는 학생이 있는 교실에 카메라를 설치하여 교실 상황을 관찰하는 실험으로 시작되는데 학생들이 카메라를 의식하는 것은 잠깐이었고 곧 평소 상태로 돌아와 왕따 학생을 괴롭히기를 계속하였습니다.

카메라(연구진)는 철저히 관찰자의 입장으로만 일관하다가 상당한 기간이 경과한 후 촬영 내용을 학생들에게 공개하였는데, 가해학생들은 녹화된 자신들의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습니다. 평소 스스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지극히 주관적인 인식의 틀에 따라 스스로에게 유리하게 또는 방어적으로 형성된 자아상에 불과하고, 카메라를 통하여 여과없이 비춰진 자신은 경악할 만한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이후 왕따 행위는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고 합니다. 즉, 왕따를 해결한 것은 선생님의 잔소리나 매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 대한 냉엄한 인식이었던 것이지요.

2500년 전에 소크라테스는 위와 같은 연구 결과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아폴론신전 기둥에 적혀 있는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는 경구를 즐겨 인용하며 진정한 사유의 출발은 자신의 상태(무지)를 철저하게 인식함에 있음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개인과 사회의 성숙을 위해서는 자기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것이 꼭 필요하고, 그런 관점에서 일기쓰기는 어린이들보다 어른들한테 더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스마트폰을 발명한 스티브 잡스는 생전에 ‘소크라테스와 점심을 같이 할 수 있다면 그것과 애플사의 모든 기술을 바꾸겠다’고 언급하여 화제가 되기도 하였는데, 정작 스마트 폰이라는 것을 며칠 전에 처음 구입해 보니 수십개의 앱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데도 일기장 앱은 없더군요(물론, 저도 새로 찾아서 깔지는 않았습니다). 꼭 일기쓰기가 아니더라도 스스로를 성찰하는 나름대로의 방법을 갖는 것이 필요한 시대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