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 매화마을 앞 섬진강가에 수월정(水月亭)이란 정자가 있다. 이 정자는 광양출신으로 나주목사를 지낸 정설(鄭渫)이 지은 것이다. 고향에서 노후를 지낼 생각으로 이곳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수월정이라 했다 한다. 수월정의 안내판에는 ‘경치의 아름다움에 반한 송강 정철은 수월정기(水月亭記)를 지어 칭송하여 노래했고, 선조 때 형조좌랑을 지낸 수은 강항 또한 수월정 30영(詠)이란 시조를 지어 노래할 정도로 아름다운 정자(亭子)’ 라고 소개하고 있다.

문제는 송강 정철이 지었다고 하는 수월정기(水月亭記)가 수은 강항의 문집인 ‘수은집’에는 강항의 작품으로 실려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고전번역원의 홈페이지에서 검색창에 수월정기를 치면 2개의 수월정기가 뜬다. ‘송강집’의 수월정기와 ‘수은집’의 수월정기인데 대조해 보면 글자 몇 자만 다를 뿐 내용이 같아 동일인의 작품임이 분명하다. 과연 원작자는 누구일까? 정철일까, 강항일까? 얼마 전 국내 유명소설가의 표절 문제가 논란이 된 적이 있었는데 조선시대에도 글자 몇 자만 바꾼 표절이 있었을까?

먼저 수월정을 세운 정설(鄭渫)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했다. 정설은 본관이 광주정씨로 1547년 광양에서 태어나 29세 때인 1576년 문과에 급제한다. 그 후 여러 벼슬을 거쳐 51세가 되던 1598년 1월 나주목사에 부임하여 5개월 만에 낙향한다. 조선왕조실록과 나주시지(羅州市誌)에도 그러한 내용이 사실로 기록되어 있다.

다음은 수월정기에 대해서 검토해 보았다. 내용 중에 대략 2군데에서 작품의 원작자를 유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먼저 ‘나주목사를 지낸 광산후인 정설이 나이 50에 세상의 버림을 받고, 선친 옥천선생의 별장이 있는 광양으로 찾아가서’(前錦牧光山後人鄭侯渫。年五十而棄於世也。遂求先大夫玉川先生之別業於光陽...)라는 부분과 ‘병화 10년에 문물은 모두 사라지고 없으나, 수월정은 의구하다’(兵火十年。文物一空。而水月則依舊也)라는 부분이었다. 즉 이 부분을 보면 수월정기의 원작자는 정설이 나주목사를 지낸 사실을 알고 있고, 병화10년을 겪은 분이라는 것이다.

송강과 수은의 생애를 비교해 보면 송강은 1536년생으로 1593년에 돌아가셨고, 수은은 1567년생으로 1618년에 돌아가셨다. 생몰연대로 보면 수월정기가 송강의 작품이라는 것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 이미 타계한 분이 1598년에 정설이 나주목사를 지낸 사실을 담아 글을 쓸 수는 없을 것이다.

다음 병화10년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전에는 10년의 병화가 없었다. 기축옥사나 신묘사화 등의 사건들이 있었지만 그런 사건들은 대개 1∼2년 만에 끝나 기간을 모두 합쳐도 병화10년이라고 표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송강은 당쟁에 의해 유배와 낙향은 몇 번 있었지만 임란 중에 타계하여 10년 병화는 겪지 않았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이다.

이에 반하여 수은은 1618년까지 생존하였으므로 정설이 나주목사를 지낸 사실을 담아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병화10년 부분도 수은은 1592년 임진왜란시 영광 수성을 위한 의병활동과, 정유재란 시 왜국에 피랍되어 1600년 5월에 귀환하였기에 오랜 전쟁을 겪은 분으로 그런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또한 ‘수은집’은 1658년에 간행되고, ‘송강집’은 1674년에 간행되어 16년이나 먼저 나온 것도 수은의 작품일 가능성이 큼을 뒷받침 한다.

그렇다면 수은의 수월정기가 어떻게 송강의 작품으로 ‘송강집’에 실리게 되었을까?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추측컨대 정보가 어두운 시대였던 만큼 ‘송강집’을 편찬할 때 누군가가 송강의 작품으로 적당히 윤색하여 끼워 넣은 것은 아닐까?

수월정기의 작자오류를 보면서 혹시 또 다른 작가의 문집이나 작품에서도 이러한 사례가 있을지, 수월정기 이외의 다른 작품들도 찾아내어 진실을 밝히는 일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