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청
2015년 09월 21일(월) 00:00 가가
나 상 아
광주지방법원 판사
광주지방법원 판사
가만히 생각해보면 말을 멋들어지게 잘하는 사람을 보며 ‘나도 저렇게 말을 잘하고 싶다’고 부러워해 본 적은 있어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을 선망한 적은 없는 것 같다. 잘 들어주는 것은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으로 쉽게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러나 실전에 들어가 보면 말을 잘하는 것만큼,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잘 들어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일반적인 대화에서 상대방의 진심을 이끌어내는 경청의 올바른 자세는 ‘내가 당신의 이야기를 잘 듣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의미에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몸짓을 한다거나 표정 등으로 당신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그러나 법정에서는 위와 같은 경청의 자세를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그리 단순한 문제만은 아니다.
형사재판의 경우, 아무리 몹쓸 범죄를 저지른 피고인이라도 최후진술 단계에서 의기소침한 몰골로 힘들고 어려운 일들로 점철된 자신의 인생역정을 이야기하고, 자신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불쌍한 노모와 자식들에 대한 걱정을 쏟아놓으며, 그때 마침 방청석에 앉아 있는 가족들 중 누군가가 오열해버리기까지 한다면, 판사도 인간인 바에야 ‘죄가 밉지 사람이 미우냐’며 울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만약 그 피고인에게 선처의 여지가 없는 경우에, 판사가 공감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인다거나 ‘당신 참 안됐소, 내 마음도 아프다오’라는 의미가 담긴 표정을 짓는다면 괜히 피고인에게 헛된 희망만을 심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 또한, 그것이 방청석에 앉아서 재판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피해자의 상처를 건드리고 분노를 자극하는 일이 되지는 않을까? 그렇다고 피고인이 자백하고 반성하며 참회의 이야기를 하는데 목석처럼 무표정하게 앉아 있는 것이 맞는지도 의문이다.
이처럼 형사재판에서 피고인의 진술을 경청하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는 어려운 문제이다.
민사재판에서의 경청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원고와 피고라는 대립하는 당사자가 있는 민사재판에서, 공정하게 재판을 진행해야 하는 판사가 어느 한 당사자의 진술에만 고개를 끄덕인다거나 공감의 표현을 하는 경우 반대 당사자로 하여금 불공정한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사자들은 판사가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지은 미소나 고개의 끄덕임 등을 자신의 승소를 암시한 행동으로 지레짐작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당사자들에게 보여지는 법정에서의 경청의 자세에 대한 판사들의 많은 고민들 중 하나일 뿐이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다’는 본래 의미에서의 ‘경청’은 여태까지 법정에서 실현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한정된 시간에 많은 사건을 처리해야 하는 시간적 제약과 기억력의 한계 때문에 판사가 법정에서 ‘보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글로 써서 제출하세요’라고 말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당사자들은 판사가 과연 그렇게 제출된 글들을 모두 읽어보는지 의심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당사자들이 제출한 서면에 가끔 ‘판사님께서 과연 이 글을 읽으실지 알 수 없으나∼’ 등의 표현이 보이니 말이다.
그러나 어떤 서면의 글과 법정에서의 진술 속에 사건의 핵심 열쇠가 숨겨져 있을지 알 수 없으니, 판사는 그러한 글과 진술의 하나라도 허투루 보고 들을 수 없다. ‘과연 이 글을 읽어보기나 할까’라는 걱정은 접어둬도 되겠다.
우리나라처럼 혈연, 지연, 학연 등이 재판의 결론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의 눈초리가 강한 곳에서는 법정에서의 사소한 자세와 표정까지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재판 때마다 그러한 자세와 표정을 일일이 의식하는 것도 쉬운 일만은 아니다. 내가 의식하지 않은 체로 하는 모든 행동이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 경지에 이르려면 어느 정도의 연륜과 노력이 쌓여야 하는 것일까? 오늘도 고민하고 노력하며 당사자들의 넓은 이해와 아량을 구하는 수밖에 뾰족한 도리가 없다.
형사재판의 경우, 아무리 몹쓸 범죄를 저지른 피고인이라도 최후진술 단계에서 의기소침한 몰골로 힘들고 어려운 일들로 점철된 자신의 인생역정을 이야기하고, 자신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불쌍한 노모와 자식들에 대한 걱정을 쏟아놓으며, 그때 마침 방청석에 앉아 있는 가족들 중 누군가가 오열해버리기까지 한다면, 판사도 인간인 바에야 ‘죄가 밉지 사람이 미우냐’며 울컥하지 않을 수 없다.
민사재판에서의 경청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원고와 피고라는 대립하는 당사자가 있는 민사재판에서, 공정하게 재판을 진행해야 하는 판사가 어느 한 당사자의 진술에만 고개를 끄덕인다거나 공감의 표현을 하는 경우 반대 당사자로 하여금 불공정한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사자들은 판사가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지은 미소나 고개의 끄덕임 등을 자신의 승소를 암시한 행동으로 지레짐작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은 당사자들에게 보여지는 법정에서의 경청의 자세에 대한 판사들의 많은 고민들 중 하나일 뿐이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다’는 본래 의미에서의 ‘경청’은 여태까지 법정에서 실현되어 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한정된 시간에 많은 사건을 처리해야 하는 시간적 제약과 기억력의 한계 때문에 판사가 법정에서 ‘보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글로 써서 제출하세요’라고 말하는 경우가 왕왕 있는데, 당사자들은 판사가 과연 그렇게 제출된 글들을 모두 읽어보는지 의심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당사자들이 제출한 서면에 가끔 ‘판사님께서 과연 이 글을 읽으실지 알 수 없으나∼’ 등의 표현이 보이니 말이다.
그러나 어떤 서면의 글과 법정에서의 진술 속에 사건의 핵심 열쇠가 숨겨져 있을지 알 수 없으니, 판사는 그러한 글과 진술의 하나라도 허투루 보고 들을 수 없다. ‘과연 이 글을 읽어보기나 할까’라는 걱정은 접어둬도 되겠다.
우리나라처럼 혈연, 지연, 학연 등이 재판의 결론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의 눈초리가 강한 곳에서는 법정에서의 사소한 자세와 표정까지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재판 때마다 그러한 자세와 표정을 일일이 의식하는 것도 쉬운 일만은 아니다. 내가 의식하지 않은 체로 하는 모든 행동이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 경지에 이르려면 어느 정도의 연륜과 노력이 쌓여야 하는 것일까? 오늘도 고민하고 노력하며 당사자들의 넓은 이해와 아량을 구하는 수밖에 뾰족한 도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