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디킨스의 소설 ‘위대한 유산’(Great Expectations)의 주인공 핍은 시골 대장장이의 도제로 살던 중 정체를 밝히지 않은 후원자로부터 거액의 유산을 받고 런던 신사라는 꿈을 키운다. 그러나 마침내 은인의 정체가 탈옥수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꿈은 허물어진다. 핍이 그동안 자신은 이웃에 살던 부유한 독신녀 헤비샴을 후원자라고 믿어왔다고 하소연하자, 변호사 재거스가 이렇게 말한다. “증거가 티끌만큼도 없지 않나, 핍. 무슨 일이든 겉모습만 보고 받아들이지 말게. 모든 일을 증거에 입각해 받아들이게. 그보다 더 훌륭한 원칙은 없네.”

민사사건의 상당수는 법리보다 사실관계를 두고 다툰다. 사실관계가 승패의 관건이 되는 사건에서 제출된 증거만으로 어느 쪽 주장이 맞는지 밝혀내기가 어려운 경우, 재판장은 결론을 내리기가 매우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사건 자체의 성격상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증거 자체가 부족한 경우도 있겠지만, 입수가 가능한 증거도 충분히 제출되지 않은 채 심리가 종결되기도 한다.

소송절차에 익숙하지 않은 당사자 중에는 재판장이 증거 제출을 요구하면 이를 자신에 대한 불신으로 여겨 발끈하는 경우가 있다. 박완서의 소설 제목처럼 ‘지 알고 내 알고 하늘이 알건만’을 반복하여 말하는 경우나, 형식적인 증거서류 몇 가지를 제출한 뒤 나머지는 재판부가 알아서 잘 판단해 달라며 선처(?)를 호소하는 경우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다.

법원도 증거 부족 사태에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짧은 시간에 많은 사건을 처리하려다 보니 당사자가 임의로 제출한 증거에만 의존해 결론을 내리기 쉽다. 심리의 효율성이 떨어진다거나 인적 관계상 거짓말을 할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로 증인을 불러 신문하는 일에도 소극적이었다.

증거가 부족한 경우 그 나머지 사실관계의 공백은 법관의 심증으로 채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법관은 숙련된 법전문가이긴 하지만 사실인정의 전문가라고 할 수는 없다. 많은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배경지식과 분쟁처리에 대한 노하우가 느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우리 사회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다양한 사실관계를 법관의 경험과 심증에 과도하게 의존해 규명하는 것은 위험한 일일 수도 있다. 법관은 증거를 살피지 않고도 사건의 실체를 꿰뚫어 보는 ‘하늘’이 될 수 없거니와, 그러한 ‘위대한 기대’(great expectation)에 부응할 것을 법관에게 요구하는 것도 옳지 않다.

원인이 무엇이든 심리 부족으로 사실관계를 제대로 밝히지 못한 경우 패소한 당사자가 재판결과에 승복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무분별한 증거신청이나 소송지연의 술책에는 적절하게 대처해야 하지만, 당사자의 입증을 방관하고 증거 부족을 곧바로 증명책임을 이행하지 아니한 사람의 불이익으로 돌리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대법원도 ‘사실심 충실화 마스터플랜’의 하나로 충분하고도 완결적인 증거조사를 명시했다.

필자는 증거 부족을 극복하고 심리를 충실하게 하는 방법으로 증거와 대화하는 것을 꼽는다. 증거는 스스로 말을 할 수 없기에 소송관계인들을 매개로 대화해야 한다. 증거를 제시한 사람은 그 취지를 설명하고, 상대방은 반박의견을 개진하며, 법원은 제시된 증거의 소송상 의미와 법적 평가를 알려줘야 한다. 증거도 강자의 편에서 생산되는 경향이 있으므로 증거의 뒷이야기도 들어보아야 한다. 다소 번거롭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필요한 증인이라면 법정으로 부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주장의 근거가 부족하다고 판단한 쪽은 언성을 높이기보다는 증거를 보완할 것이다. 공개된 법정에서 자신과 상대방이 제출한 증거를 충분히 검토한 당사자라야 재판결과에 승복할 마음도 생길 것이다.

증거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당사자의 주장을 경청하는 일 못지않게 충실하고 신뢰받는 재판을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