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서원에 다녀왔다. 사람들 반응은 비슷했다. “광주에도 서원이 있어?” 광주시 광산구 광산동 황룡강 지류에 자리한 ‘월봉서원’. ‘너브실 마을’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도 불리는 광곡마을 백우산(白牛山) 품에 안겨 있다.

월봉서원을 소개하고 싶었던 건, 그곳이 여전히 살아 숨쉬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서원’하면 으레, ‘시대에 뒤떨어진 고리타분한 곳’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월봉서원은 달랐다. 소중한 문화 자산을 활용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되면서 ‘우리와 호흡하고’ 있다. 광주 외곽 시골길을 달린다. 마을 입구에 도착해 낮은 흙담길을 돌아들면 서원이 보인다. 생각보다 세월이 흔적이 묻어나지 않는다 싶었더니, 이런 내력이 있다.



월봉서원은 조선 중기 유학자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1527∼1572)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고봉은 스물 여섯의 나이차를 뛰어 넘어 사상적 교류를 나눴던 퇴계 이황과의 ‘사단칠정’ 논쟁으로 유명한 성리학자다.

월봉서원은 고봉 사후 7년만인 1578년 호남 유생들이 지금의 광산구 신룡동에 ‘망천사’라는 사당을 세우면서 시작된다. ‘월봉’이라는 서원명은 1654년 효종이 내린 것이다.

하지만 서원은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문을 닫았다. 현재 서원의 중심 공간인 ‘빙월당’은 1941년에 지은 건물이다. 이후 1978년 사당 숭덕사, 장판각, 내삼문, 외삼문 등을 건립했고 현재의 모습을 갖춘 건 1991년이다.

작은 개울을 지나 서원 안으로 들어섰다. 양쪽 옆에 서원의 기숙사인 동재(명성재)와 서재(존성재)가 자리하고 있다. 돌계단을 오르면 ‘빙월당(氷月堂)’이 보인다. 정조가 고봉의 고결한 학덕을 기려 ‘빙심설월(氷心雪月)’이라 했다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효종이 고봉의 사람됨이 ‘잘 단련된 금과 같고 윤택한 옥과 같으며, 물 속의 달처럼 맑고 투명한 병과 같다’고 한 데서 붙은 것이라고도 전한다.

빙월당 앞은 유생복 차림의 젊은 선비들로 북적였다. 옥색 한복을 차려 입고,부채를 부치며 마당을 서성이는 이들은 서원이 운영하는 ‘선비의 하루’ 프로그램 참가자들이다.

시(詩), 서(書), 화(畵)에 모두 능했던 선비들의 일상을 직접 체험해 보는 ‘선비의 하루’ 참가자는 목포 문태고 학생들이었다.

김시완(문태고 1년)군은 “서원이나 선비의 삶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어 좋았고, 무엇보다 직접 선비복을 입고서 프로그램에 참여하니 색다른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빙월당 뒤편으로 돌계단을 오르면 고봉의 위패를 모신 숭덕사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빙월당의 뒷모습이 한가롭다. 멀리 보이는 마을 모습도 인상적이다. 서원 뒤쪽에는 ‘철학자의 길’이 있다. 고봉 선생 부부가 묻힌 묘와 그가 생전에 학문을 강론했다는 귀전암터를 거쳐 백우산 전망대, 백우정까지 이어지는 산책길이다.

무덤까지만 가보기로 했다. 대나무 등이 울창한 숲길로 들어서니 시원한 기운이 가득하다. 고봉 선생의 한시가 적힌 바위를 지나고, 조금은 쓸쓸해 보이는 부부의 무덤가에 잠시 앉았다 내려온다. 다시 빙월당 마루다. 시원한 바람에 마음까지 상쾌해진다. 빙월당 안에서 내어다보는 바깥 풍경은 또 색다른 느낌이다.

월봉서원은 과거에 머물지 않고, 현재와 끊임없이 교류하고 있다. 문화재청 등이 진행하는 향교·서원 체험 프로그램, 생생문화재 사업 등을 통해서다. 특히 광산구청, 광산문화원 등 공공기관과 ‘교육문화공동체 결’, ‘라우’, ‘상상창작소 봄’ 등 젊은 문화기획자 그룹이 결합해 만들어낸 프로그램들은 월봉서원을 알리는 일등공신이다.

앞서 언급한 ‘선비의 하루’는 대표 프로그램이다. 숭덕사 배례 체험, 다례 체험, 자경족자 만들기, 철학자의 길 산책 등으로 구성돼 있다. 고봉과 퇴계의 아름다운 만남을 연극으로 꾸민 ‘드라마 판타지아’도 눈길을 끄는 프로그램이다. 유생복으로 갈아 입고 500년전 그 시절로 들어가는 귀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밖에 아이들에게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꼬마 철학자 상상학교’, 강좌와 공연 등이 어우러진 ‘살롱 드 월봉’, ‘철학자의 부엌’, ‘청소년 이기(理氣)진로 교실’ 등 흥미로운 프로그램이 많다.

18일 열리는 ‘서원마을 잔치-월봉 유랑’은 선비를 품고 키웠던 선비 마을 이야기를 마을 잔치로 꾸민 프로그램이다. 선비의 놀이터, 선비의 풍류, 선비의 부엌 등 다채로운 행사가 월봉서원과 너브실 마을 일원에서 열린다.

마을 입구에는 또 다른 공간이 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다. 편안한 마음으로 들러 차 한잔 마실 수 있는 ‘다시다시(茶時)’ 공방이다. 이곳에서는 앞으로 차 소믈리에 강좌, 인문학 강좌, 작은 공연 등을 진행할 예정이다.

월봉서원엔 언제 가도 좋지만 봄가을이면 더 좋을 듯하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철학자의 길을 차분히 걷는 것, 서원 바로 옆에 조성중인 공원을 느릿 느릿 둘러보는 것, 바로 월봉서원을 즐기는 또 다른 방법이다. ‘서원은 살아 있다’ 그곳을 떠나오며 든 생각이다.

또 하나, 광산구가 진행하는 ‘광산, 가옥의 사계’ 프로그램이 열리는 김봉호 가옥〈아래 기사 참조〉, 장덕동 근대 가옥, 용아 박용철 생가 등을 찾아도 좋을 듯하다.

월봉서원 홈페이지(www.wolbong.org)에 가면 다양한 프로그램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문의 062-960 -8272.

/글·사진=김미은기자 mekim@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