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술(酒)이 말을 한다면 “저는 억울합니다. 세상에 수많은 음식이 있지만 저처럼 누명을 많이 쓰는 음식이 또 있을까요? 온갖 못된 행위는 자기들이 다하고 문제가 되면 저를 핑계를 대니 정말 억울합니다. 심지어 국민을 개돼지라고 망언을 한 그 인간도 저 때문이었다고 둘러댔다니 분통이 터질 노릇입니다”라고 푸념할 것 같다.

생각해보니 술처럼 억울한 누명을 쓰는 음식도 없을 것 같기는 하다. 그래, 술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과음하고 행동을 절제하지 못한 인간들이 잘 못이지 술은 죄가 없다 하겠다. 하지만 멀쩡한 인간을 무장해제 시키는 술의 속성이 죄라면 죄기에 인간과 술의 공방은 계속될 것 같다.

조선시대에도 술로 망가진 사람들이 수 없이 많았다. 양녕대군은 술 때문에 아버지인 태종의 신임을 잃고 동생 충녕에게 세자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양녕대군의 아들 이혜(李諧) 역시 취중에 살인을 저질러 왕의 조카임에도 경남 고성으로 유배 가서 죽었다. 연산군이나 광해군의 폭정에도 기폭제 역할을 한 것 역시 술이었다.

송강 정철은 당대 최고의 애주가였다. 그가 쓴 시조 장진주사(將進酒辭)의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 꺾어 세어가며/ 무진 무진 먹세 그려’의 구절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는 술을 즐겼다. 선조실록에 보면 ‘도승지 정철은 술주정이 심하고 광망(狂妄)하니 해임 하소서’라거나 ‘예조 판서 정철은 술을 좋아하고 실성(失性)하여 지난날 승진 발탁했던 일에 대해서도 물의가 많으니…개정 하소서.’라고 사간원에서 까지 그의 주벽을 탄원했다. 선조도 그의 술버릇을 고치기 위해 작은 은잔으로 하루 세 잔만 먹도록 했으나 송강은 은잔을 넓게 펴서 아예 주발로 만들어 마셨다면 그의 실력을 알만하다. 송강은 선조의 신임으로 다시 서용되긴 했지만 술로 인한 파직의 수모와 지탄은 끝내 그를 따라다녔다.

오원 장승업 역시 호가 취명거사(醉冥居士)라고 할 만큼 술에 살고 술에 죽었다. 고종황제가 부탁해도 그리지 않던 그림을 뒷골목 기생의 술 한 잔에 선뜻 붓을 드는 술꾼이었다. 그림값을 모았다면 당대 거부가 되고도 남았겠지만 평생 그림값을 술 마시는데 모두 없앴으니 과히 술꾼이라 할만 했다. 천재화가였지만 술에 먹힌 그의 삶은 너무나 안타까웠다.

영조는 술의 폐해가 심하고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금주령을 내려야 한다는 신하들의 건의에 대해 “술은 곡식을 썩히고 재물을 허비하며, 술을 마시면 예의를 지키지 않아 집안이 망하고 관리들은 기강이 무너져 나라가 망하게 된다. 술을 마시는 것을 금지해 곡식을 절약하고 윤리와 풍토를 바라 잡도록 하라”고 금주윤음을 선포했다. 백성들에게 전면 금주령을 내린 것이다. 궁중의 제사 때에도 술 대신 차를 올리도록 하고 금주령을 어긴 자를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조 자신은 정작 백성들 몰래 반주를 즐겼다. 당시 문인 성대중이 지은 ‘청성잡기’에는 임금이 내린 송절차를 마시고 나니 취기가 돌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암행어사 박문수가 영조에게 술을 적게 마실 것을 권유했다는 기록을 보면 권력자의 이중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명심보감에 ‘주중불언은 진군자요 재상분명은 대장부(酒中不言眞君子 財上分明長夫)’라고 했다. 술에 취했을 때 허튼 소리를 삼가는 자가 참 군자이며, 재물 앞에서 공사(公私)를 분명히 하는 자가 대장부라는 뜻이다. 최근 지도층의 폭언과 망언, 공사구분 못하는 탐욕이 민심에 회오리를 일으키고 있다. 술과 재물은 우리 생활에서 꼭 필요하지만 지나치거나 정도를 잃으면 자신을 망가뜨린다는 것을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