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 구로(九老)마을은 필자에게는 익숙한 지역이다. 수년 전 무안 청계면에 있는 목포대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일명 ‘보따리 장사’라고 부르는 시간강사를 하던 때였다. 막막하고 허허롭던 시절이었다. 필자는 강의가 없는 시간에는 서둘러 캠퍼스를 나와 인근 해안으로 차를 몰았다. 이유 없이 바다가 보고 싶었고 무시로 떠오르는 상념들을 씻어내고 싶었다. 얼마쯤 달리다 보면 차는 어느 샌가 탁 트인 해안에 닿아 있곤 했다.

필자에게 그 바다는 갯벌의 숨구멍과도 같았다. 탈출구 없는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비상구였을지 모른다. 물이 들고 날 때, 바다는 늘 그렇듯 순리와 순명을 가르치는 듯 했다. “기다려라. 침묵하라. 그리고 바위처럼 무겁게 네 자리에 서있으라.”

깊은 바다는 멀리 흐른다고 했던가. 수심이 깊어질 때, 바다는 먼 곳으로 흐르며 깊을수록 고요하고 풍요로워지는 내밀한 비밀을 보여주곤 했다. 구로마을 갯벌 너머로 펼쳐진 바다를 보며, 필자는 한때나마 자유와 비상의 시간을 누릴 수 있었다.

다시, 시간이 흘러 그때 보았던 구로마을과 그 바다를 보러 간다. 시간은 물처럼 흐른다는 말은 진리와도 같아서 예전에 봤던 구로의 풍경은 잔상으로만 남아 있을 뿐, 여전히 새롭다.

무안반도 청계면은 넓은 갯벌을 배후지로 거느린 지역이다. 동쪽으로는 승달산을 중심으로 계곡이 형성돼 있고 서쪽으로는 바다 너머 운남면, 신안 압해면과 마주한다. 여기에 남북으로 평야가 기다랗게 형성돼 있어 산과 바다, 갯벌과 농토가 맞춤하게 조화를 이룬다.

청계면 중에서도 구로(九老)라는 마을은 보석 중의 보석이다. 이곳은 어촌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육지 산물의 명성 또한 자자하다. 많은 어가들이 양파를 재배하는데, 전국 으뜸이라는 자부심이 만만치 않다. 알려진 대로 무안 양파는 단단한데다 식감이 좋아 최고로 친다. 즙이 풍부하고 단맛이 배어 있어 다양한 요리의 부재료로 각광을 받는다.

무안이 자랑하는 갯벌 낙지도 이곳 구로에서 많이 난다. 찰진 갯벌 덕에 낙지 다리도 길고 부드러워 다른 지역의 것보다 상품성이 좋다. 지난해에는 2ha에 달하는 낙지어장을 설치해 다량의 낙지를 수확할 수 있는 토대를 갖췄다. 이밖에 김 어장 73ha를 비롯, 마을에 허가된 어장은 모두 270ha에 달한다.

이처럼 구로마을은 천혜의 자연 조건을 갖췄다. 마을이 자리한 지형을 보면 충분히 이해되는 대목이다. 수륙으로 대변되는 갯벌과 황토가 구로마을의 최대 청정 자원인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청정 바다에서는 낙지와 김 같은 수산물이 철철이 생산되고, 기름진 논밭에서는 봄이면 양파, 가을에는 쌀이 출토되니 말이다.

필시 구로라는 마을 지명과 무슨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사전적인 구로(九老) 지명은 장수촌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아홉 명의 노인들 내지는 아홉 명 이상의 노인들이라는 의미인데, 예로부터 90세 이상의 노인들이 매년 아홉 명 이상 거주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마을이 들어앉은 배후가 장수촌 지형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수사가 없다. 다만 낯선 외지인은 구로라고 이름을 작명한 이들의 마음만을 다복이 헤아려 볼 뿐이다. 야트막한 구릉에 펼쳐진 황토와 너울거리는 청색의 바다, 그리고 찰진 갯벌은 구로마을 주민뿐 아니라 이 땅의 무명한 생명들을 그렇게 길러냈을 것이다.

구로마을은 2015년 해양수산부가 추진했던 6차산업화 역량강화사업에 선정된 바 있다. 수산물의 생산 증대와 가공작업장 조성, 생활기반 확충과 같은 사업을 매개로 지금보다 더 나은 마을을 만들어보자는 취지였다. 주민들은 ‘구구팔팔 장수, 융복합 창조마을’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팔을 걷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의치 않은 사정으로 역량강화사업은 본 궤도에 오르지 못했다.

정경태(61) 어촌계장은 “우리 마을은 전국 어느 어촌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지리적인 여건이 좋다”며 “향후 발전 가능성이 무궁무진해 오늘보다는 내일이 기대되는 지역”이라고 말했다.

/박성천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