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어느 고등법원에서 법원장님을 보필하는 기획법관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 법원에서 근무한 지 8∼9년 정도 되던 해였지만 모르는 것 투성이인 상태여서 법원장님을 모시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어느 지방 방송사에서 기획한 프로그램에 고등법원장님이 섭외가 되셨는데, 명사들이 좋은 책을 소개하는 코너였다.

고등법원장님을 모시는 입장이므로 좋은 책을 소개해드려야 할 텐데 평소에도 책을 많이 읽지 않는 나였기에 참으로 난감하였다.

그러자 당시 고등법원장님께서 이 책 어떻겠느냐고 하시면서 건네주신 책이 있는데, 그 책의 제목이 바로 ‘경청(마음을 얻는 지혜)’이라는 책이었다.

책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악기제조회사에 근무하는 주인공 이청은 귀머거리 베토벤과 같이 남의 말을 잘 듣지 않고 자기 고집과 주장만을 내세우며 회사생활을 하기에 이토벤이라고 불린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공은 회사의 구조조정과 함께 수술이 불가능한 악성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게 된 주인공은 죽기 전에 발달장애를 가진 아들을 위해 바이올린을 제작하게 된다.

자신과 같이 까칠하고 고집불통들만 모인 팀에서 암으로 인해 점점 청력을 상실해가는 주인공은 바이올린 제조 전문가인 팀원들의 말을 듣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말을 눈이나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내용이다.

지금까지 재판을 하면서 다양하고도 많은 사람을 만난 것 같다. 법정에서 짧은 시간 만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당사자와 증인 등을 모두 합하면 최소한 수천 명은 만나지 않았을까 싶다. 그들 대부분은 본인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직접 또는 변호사를 통해 하고 판사의 말을 들은 다음 법정 문을 나선다.

하지만 그 중에서는 판사의 거듭된 설명과 제지에도 다른 사람의 재판에 지장을 줄 정도로 목소리를 높이면서 억지를 부리는 사람, 판사가 뭐라고 묻든지 질문과는 관계없이 본인이 하고 싶은 말만을 반복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판사로 임관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에는 그러한 당사자들을 보면서 참 답답해 했었다. 재판에는 법에서 정한 절차가 있고, 절차가 그렇게 정해진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인데, 중간자인 판사의 입장에서 설명을 해줘도 아무 말도 듣고자 하지 않는 그들이 너무 안타까웠다.

당시에는 당사자들의 논리적이지 못한 말보다는 논리정연한 법전이나 해석서, 대법원 판례가 훨씬 더 믿음직스러웠다.

시간이 더 흘렀다고 해서 스스로가 과거보다 더 훌륭한 판사가 됐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오히려 나보다 훌륭한 후배들을 보면서 내가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당사자들을 대하는 내 마음가짐만큼은 과거보다는 조금 더 나아지지 않았을까 스스로 위로해본다. 앞뒤가 맞지 않는 당사자의 주장이건, 질문과는 무관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을 하는 증인이건, 이제는 좀 더 여유를 가지고 그들의 말을 듣고자 노력한다.

그들이 그런 말을 하는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이고 최소한 본인들이 판사 앞에서 하고 싶은 말이라도 충분히 했다는 만족감이라도 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내가 판사라는 이유로 쉽사리 오만한 분별심을 작동시켜 당사자의 이야기에 담장을 쌓지는 않아야겠다는 의지도 다진다. 혹시 거기에 진실이 숨어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수년 전 고등법원장님께서 경청이라는 책을 건네신 것은 내가 가는 길을 이미 20여 년 전에 걸었던 선배로서 후배인 나에게 그러한 것을 가르치시고자 하셨던 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공자도 나이 60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남의 말에 자연스럽게 귀를 열게 되는 이순(耳順)에 이르렀다고 하니 나로서는 갈 길이 얼마나 먼지 끝이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당신의 말에 귀 기울이기 싫으니 이제 그만하라는 “알겠습니다!”가 아니라 진정 그들의 말을 이해하였기에 “알겠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내가 되기를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