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이 지면을 통해 몇 달 동안 초임 민사재판장을 하면서 느낀 몇 가지 소회를 일반 독자들에게 조심스럽게 말씀드려보고자 한다.

첫째, 변론주의(주요 사실과 증거의 수집·제출 책임을 당사자에게 맡기고 당사자가 변론에서 제출한 소송 자료만을 재판의 기초로 삼는 원칙)가 적용되는 민사재판에서 판사의 역할에 대한 고민이다.

어떤 당사자들은 “판사님. 저의 억울함을 풀어 주세요. 정의가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 주세요”라고 말한다. 문제는 판사도 당사자들이 충분한 주장과 입증을 통해 진실을 밝혀 주지 못한다면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판사는 누구보다 공정하고 명쾌한 판단을 하고 싶지만 재판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다 보면 자칫 한쪽 당사자로부터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판사는 경기의 심판과도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의 입장만을 귀담아 들을 수 없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어떤 당사자는 향후 입증계획을 물으면 “이미 다 제출했는데 더 이상 무엇을 더 해야 하느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상당수의 민사재판 당사자들은 아무래도 법률 전문가가 아니다 보니 본인들의 억울함을 호소함에 비해서 실제로 어떤 증거를 제출하고 어떻게 재판을 진행해서 자신의 억울함을 증명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모르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하지만 판사가 어느 일방 당사자에게 많은 내용을 설명하다 보면 상대방은 불만을 가질 수 있다. 그렇다고 판사가 가만히 있기에는 무심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필자가 아직 경험이 적다 보니 어떤 경우에는 설명이 부족하고, 어떤 경우에는 불필요하게 말을 많이 할 때도 있는 것 같다.

둘째, 재판의 신속성과 완결성을 동시에 충족시키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초기에는 법정에서 당사자들의 말을 많이 듣고 당사자들의 의견도 묻는 등 한 사건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판사에게는 수많은 사건 중 하나이지만 당사자들에게 일생에 한번뿐인 재판인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들이 법정에서 판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재판을 진행하다 보니 다른 사건들의 진행이 늦어진다는 것이다. 반면 여러 사건을 빨리 진행하려다 보면 구술변론의 시간은 줄어들게 된다. 당사자 본인 소송의 경우 미리 준비서면이나 증거를 제출하기가 쉽지 않아 변론기일에서 구술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경우가 많은데 판사가 충분히 경청하는 것이 이상적이기는 하나 다른 사건들이 밀리다보면 급한 마음에 “필요한 내용은 준비서면으로 제출하세요”라고 말하게 된다. 재판을 마치고 사무실에 오면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셋째, 법대로 하는 것이 항상 최선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당사자들은 “상대방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으니 법대로 해 달라. 승패가 어떻게 되더라도 끝까지 법대로 하겠다”라고 한다. 당사자들도 얼마나 답답하고 억울하면 재판까지 왔겠는가? 그러나 법대로 하는 것이 항상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 것 같다. 판사는 당사자들의 주장과 증거를 면밀히 살펴 보다 진실에 가깝게 다가가려고 노력할 뿐 당사자 사이의 진실을 완벽하게 알 수는 없다. 그래서 때로는 당사자에게 만족스럽지 못한 판결을 선고하기도 할 것이다.

재판을 하다 보면 청구 금액에 비하여 변호사 비용, 감정 비용 등 많은 비용이 드는 사건이 있어 조정이나 화해 권고 결정을 권하기도 하는데 감정적 문제로 무조건 법대로 하겠다는 당사자들도 있어 안타까울 때가 있다.

처음 민사재판장을 맡으면서 느낀 이런저런 생각을 쓰다 보니 새삼 필자의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이 글은 필자가 재판을 담당하는 많은 당사자에게 자기 고백과도 같은 글 정도로 봐 주었으면 좋겠다. 언제나 좋은 결론, 합리적이고 명쾌한 판결을 내리고 싶지만 아직 재판 진행에서도, 결론을 내림에 있어서도 미숙함이 많은 판사의 죄송한 마음을 널리 이해해 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