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불재 ‘노무현 연설 바위’
2019년 03월 27일(수) 00:00 가가
[강대석 시인·행정학 박사]
삼월도 막바지에 이른 지난 주말 모처럼 무등산에 올랐다. 아직 꽃샘추위가 여전한데도 증심사 계곡에는 봄맞이 산행 인파로 제법 북적였다. 우리나라 국민들처럼 등산을 좋아하는 민족도 드물 것이다. 언제부턴가 TV 낚시 관련 방송이 인기를 끌면서 국민 취미 생활 선호도에서 낚시 인구가 등산을 앞질렀다는 뉴스도 있었지만 주말 전국 유명 산하를 가득 메우는 산행 인구를 감안하면 그런 통계가 별로 믿어지지 않는다.
등산은 조선 시대에도 유산(遊山)이라는 이름으로 선비들 사이에서 많이 행해졌다. 조의제문으로 유명한 김종직은 42세에 지리산 천왕봉을 오른 뒤 ‘유두류록’(遊頭流錄)을 남겼고, 그의 제자 김일손은 26세에 천왕봉에 오른 뒤 “선비가 태어나서 한 곳에 조롱박처럼 매여 있는 것은 운명이다. 천하를 두루 보고서 자신의 소질을 기를 수 없다면, 자기 나라의 산천쯤은 마땅히 탐방해야 할 것이다”라고 글을 남겼다. 이렇듯 조선 시대에 남겨진 지리산 유람기만 해도 100여 건이 넘고 무등산 유람기도 20여 건에 이른다.
무등산 유람기 중에는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 쓴 ‘유서석록’(遊瑞石錄)이 그중에 압권이다. 몇 년 전 재현 행사도 있어서 잘 알려져 있지만 그 내용을 보면 그 시절 무등산의 면모와 선비들의 산행 모습을 익히 짐작해 볼 수 있다. 고경명은 41세 때인 1574년, 광주 목사인 임훈(林薰)의 초청으로 4박 5일간 무등산을 유람한다. 고경명은 당시 74세였던 임 목사의 초청장을 받고 나이 많은 분과의 약속에 늦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하루 전에 출발하여 4월 20일 약속 장소인 증심사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아침에 취백루에서 임 목사 일행을 만난다.
임 목사의 일행에는 서하당 김성원을 비롯한 일곱 명의 선비들이 함께 했다. 이들은 반가움에 아침부터 술을 두어 순배 한 뒤 증각사와 중령을 거쳐 입석대에 올라 인근 염불암(念佛庵)에서 1박을 했다. 다음날에는 천왕봉과 비로봉, 반야봉을 둘러보고 서석대와 금석사를 거쳐 규봉암 근처의 문수암에서 또 1박을 한다. 그 다음 날은 아침에 임 목사의 제안으로 광석대를 주제로 벌주 마시기 시 경연을 하고 영신 계곡으로 내려와 화순의 적벽과 소쇄원을 거쳐 식영정에 이른 후 다음 날 환벽당에서 모든 일정을 마친다. 요즘 같으면 하루 코스 남짓한 거리를 나흘간의 시간적 여유를 두고 시주를 나누면서 그야말로 유산(遊山)을 즐긴 것이다.
정치인들 중에는 등산을 좋아하는 분들이 유난히 많다. 문재인 대통령이 그렇고 박원순 시장이나 손학규 대표 등이 유명하다. 고 노무현 대통령은 재임 중에 특별히 무등산에 올라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7년 광주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한 후 다음 날인 5월 19일 오전 증심사 입구에서 출발하여 당산나무와 중머리재를 거쳐 장불재에 올랐다. 이날 산행은 1999년 후보 시절 “광주시민이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면 대통령이 되어 반드시 무등산을 오르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8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날은 주말이었다. 신록이 우거지기 시작한 무등산에는 쾌청한 날씨와 함께 꾀나 많은 산행객들이 모여 들었다. 필자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장불재에 도착하여 한 너럭바위에 올라가 함께한 시민들에게 육성으로 연설을 했다. 인사 말씀 정도로 끝날 줄 알았던 연설은 무려 한 시간이 넘게 이어졌다. 사람 사는 세상을 주창하며 이상과 현실 속에서 고뇌했던 집권 5년 동안의 경험과 회한을 작심한 듯 갈파한 현직 대통령의 무등산 첫 산상 연설이었다.
“좀 더 멀리 봐 주십시오. 역사란 것은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멀리 보면 보입니다. 눈앞의 이익을 좇는 사람과 대의를 좇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의만 따르면 어리석어 보이고 눈앞의 이익을 따르면 영리해 보이지만 멀리 보면 대의가 이익이고 가까이 보면 눈앞의 이익이 이익입니다.” 바로 그날 연설의 일부분으로, ‘바보 노무현’의 삶과 철학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누구나 처음에는 대의를 좇다가도 그 길이 자기에게 손해이거나 눈앞의 이익이 되지 못하면 돌변하여 태도를 바꾸는 것이 세상인심이 아니던가?
지난 주말 오랜만에 장불재에 올라 그 너럭바위를 보면서 그 때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벌써 12년 전이라니 문득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네”라는 옛 시조가 생각났다. 마침 장불재 안내판에 예의 산상 연설이 있었던 곳이란 설명이 있어 기억을 새롭게 했다. 그러나 정작 그 바위는 잊고 있었다. 바위 곁에 조그만 이름표라도 세웠으면 좋겠다.
무등산 유람기 중에는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이 쓴 ‘유서석록’(遊瑞石錄)이 그중에 압권이다. 몇 년 전 재현 행사도 있어서 잘 알려져 있지만 그 내용을 보면 그 시절 무등산의 면모와 선비들의 산행 모습을 익히 짐작해 볼 수 있다. 고경명은 41세 때인 1574년, 광주 목사인 임훈(林薰)의 초청으로 4박 5일간 무등산을 유람한다. 고경명은 당시 74세였던 임 목사의 초청장을 받고 나이 많은 분과의 약속에 늦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하루 전에 출발하여 4월 20일 약속 장소인 증심사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아침에 취백루에서 임 목사 일행을 만난다.
그날은 주말이었다. 신록이 우거지기 시작한 무등산에는 쾌청한 날씨와 함께 꾀나 많은 산행객들이 모여 들었다. 필자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장불재에 도착하여 한 너럭바위에 올라가 함께한 시민들에게 육성으로 연설을 했다. 인사 말씀 정도로 끝날 줄 알았던 연설은 무려 한 시간이 넘게 이어졌다. 사람 사는 세상을 주창하며 이상과 현실 속에서 고뇌했던 집권 5년 동안의 경험과 회한을 작심한 듯 갈파한 현직 대통령의 무등산 첫 산상 연설이었다.
“좀 더 멀리 봐 주십시오. 역사란 것은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멀리 보면 보입니다. 눈앞의 이익을 좇는 사람과 대의를 좇는 사람이 있습니다. 대의만 따르면 어리석어 보이고 눈앞의 이익을 따르면 영리해 보이지만 멀리 보면 대의가 이익이고 가까이 보면 눈앞의 이익이 이익입니다.” 바로 그날 연설의 일부분으로, ‘바보 노무현’의 삶과 철학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누구나 처음에는 대의를 좇다가도 그 길이 자기에게 손해이거나 눈앞의 이익이 되지 못하면 돌변하여 태도를 바꾸는 것이 세상인심이 아니던가?
지난 주말 오랜만에 장불재에 올라 그 너럭바위를 보면서 그 때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벌써 12년 전이라니 문득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네”라는 옛 시조가 생각났다. 마침 장불재 안내판에 예의 산상 연설이 있었던 곳이란 설명이 있어 기억을 새롭게 했다. 그러나 정작 그 바위는 잊고 있었다. 바위 곁에 조그만 이름표라도 세웠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