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대산의 중대사자암(中臺獅子庵) 부근에서 만난 다람쥐들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적멸보궁을 향해 걷는 돌계단에서 다람쥐들은 길을 인도하는지, 놀아 달라 하는지 혹은 자기네에게 볼일 없냐는 식으로 계속 알짱거린다. 왜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을까. 찾아보니 등산객들이 다람쥐에게 먹이를 주곤 했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보면 자신들에게 먹이를 줄 것이라 기대해 사람 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불확실하고 위험한 세계에서는 두려움의 본능이 생존과 안전을 보장해 준다. 하지만 동물들도 인간이 자신을 해치지 않고 자신들의 생존에 위험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다. 야생동물 먹이 주기가 야생의 생존 방식 자체를 망치고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기에 동물들이 위급한 상황에서 잘못된 판단을 할 수 있다는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오대산 사자암에서 적멸보궁에 이르는 길을 오르는 이들은 아마 상당수가 불자이거나 혹은 최소한 부처님의 땅과 같은 성지를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들은 모두 이곳에서는 살생을 하면 안 된다는 착한 마음을 지녔을 수도 있다. 그래서 자신들을 괴롭히거나 해하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없을 다람쥐들이 사람들 앞에서 한참 까불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다람쥐-사람-부처 간의 어떤 믿음의 관계가 만들어졌고 그것이 튼튼히 이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적멸보궁에 이르러 가쁜 숨을 고르며, 적멸보궁의 의미를 헤아리고 있었다. 깨달음의 최고 경지가 적멸(寂滅)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할까 궁금해하고 있던 찰나. “보살님 떡 좀 드세요. 그리고 하산하실 때 울력 보시하고 공양도 하고 가세요”라고 산중의 아주머니들이 말을 거셨다. 적멸보궁에 바쳐진 공양미들을 300m 떨어진 중대사자암으로 옮겨 달라는 부탁이었다. 다람쥐들이 나를 믿어 주듯이, 산중의 보살님들도 처음 보는 나를 믿어 주셨다. 내가 그 쌀을 사자암으로 운반할 것이라 어찌 믿는지, 혹시라도 내가 그 쌀주머니를 들고 집에 가 버릴 수도 있지 않은가? 왜 이 산중의 다람쥐나 보살님들은 나를, 아니 사람을 믿어 주는 것일까?

산중에서 쌀을 운반하는 데 인부를 사서 일당을 주고 일을 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번거롭고 불확실한 방식으로 쌀을 운반할까? 그리고 왜 사람들은 보살님의 요청에 흔쾌히 응할까? 울력 보시에 참가하는 순간, 등산이라는 행위의 의미는 단순히 개인의 건강과 휴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종교적 수행이자 산중 살림살이를 지키기 위한 것으로 확장된다. 기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사람과 자연의 관계, 그리고 공동체의 살림살이는 상품-화폐 관계로 이루어진 세월보다 신뢰와 호혜 및 도덕경제에 기반한 세월이 훨씬 길다.

문득 오대산의 다람쥐와 울력 보시는 평화의 기초를 보여 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본적인 생존에 대한 공포에서 해방될 경우, 인간도 동물도 생명체로서 번영된 삶을 살고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그리고 나아가 다른 생명에 대해 (불확실하고 번거롭지만) 신뢰를 갖고 공통의 가치 및 세계와 살림살이를 가꾸고 또한 타자에게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고 촉구할 때 평화는 가능해진다.

그렇다면 오대산에서 생명체 간의 신뢰, 공존, 평화는 어떻게 가능해졌을까? 월정사에서 상원사에 이르는 8km 길은 비포장 도로이다. 포장을 하려는 당국의 시도를 산사에서 적극적으로 반대했고, 월정사 초입의 전나무길 도로도 포장을 걷어 내고 흙길을 조성했다. 도로를 포장하면 무릇 생명체가 숨을 쉴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전쟁 때 상원사를 불태워 소개(疏開)하려던 국군의 시도에 ‘나를 사찰과 함께 태우라’며 목숨을 걸고 항거하신 한암 스님의 일화도 있다. 생명체와 그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하고 때로는 목숨까지 건 불교 공동체의 결기, 품격, 가치가 변화하는 현대 세계와 만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른 여름휴가에, 푸르른 오대산의 평화를 잠시 접하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