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영의 ‘우리지역 우리식물’-여름의 꽃, 홍도원추리
2022년 06월 09일(목) 00:30

이소영 <식물 세밀화가>

어릴 때부터 채소 반찬을 좋아했다. 고사리, 참나물, 시금치와 같은 흔한 잎채소부터 연근, 더덕과 같은 뿌리채소까지. 특히 봄이면 엄마가 무쳐 주던 원추리나물을 참 좋아했다. 넓은 잎의 아삭함과 고소함을 잊을 수 없다.

어릴 적 식탁 위에서만 보았던 원추리를 들에서 만난 것은 대학교 4학년 때였다. 견학 간 충청도의 한 수목원에서 나리와 비슷한 주황색 꽃이 보였다. 물론 나리와는 꽃과 잎의 형태가 미세하게 달랐다. 교수님께 식물의 이름을 물으니 원추리라 말씀하셨다. 내가 늘 먹어온 원추리나물. 나는 왜 원추리의 꽃이나 열매를 상상해 본 적 없던 거지?

사실 원추리는 관상식물로 식재되기 이전에 나물로 이용되어 왔다. 이들은 이른 봄부터 잎을 내다가 더위가 시작되는 초여름, 나팔 모양 꽃을 피운다. 우리는 봄의 어린잎을 수확해 삶아 무쳐 나물로 먹는 것이다.

내가 그리는 식물학 그림 혹은 식물 세밀화에 대해 누군가에게 설명할 때에 나는 신사임당의 조충도를 빗대곤 한다. 식물 세밀화는 과학 안의 그림으로서 식물종의 형태를 기록한 것이지만, 일반적인 식물화는 예술 안에서 식물에 개인의 사유를 담거나 식물을 소재로 아름답게 그리는 그림이다. 우리나라 식물화의 대표적인 예는 바로 신사임당의 조충도다. 이 조충도에는 원추리가 그려져 있다.

신사임당이 그린 원추리가 어느 종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것이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개체라면 백운산원추리가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것으로는 큰원추리, 각시원추리, 백운산원추리, 노랑원추리, 애기원추리 등이 있고, 이 중 조충도의 그것처럼 꽃의 크기가 비교적 크고 색이 주황빛이며 화서가 닮은 것은 백운산원추리다.

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원추리 중에는 전라도 신안군의 홍도를 고향으로 하는 홍도원추리도 있다. 이름부터 ‘홍도’인 이 식물의 학명 종소명은 ‘홍도엔시스’다.

오 년여 전 여름, 출장으로 홍도에 간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 도입되어 있는 원예종 원추리를 그리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다가 원예종만을 그리는 것에 한계를 느껴 자생종 원종을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다섯 시간을 달려 홍도에 다다랐을 때, 바다와 하늘을 가르는 곳에 노란 꽃밭이 펼쳐져 있었다. 홍도원추리였다.

피나물 군락, 석산 군락처럼 숲속에서 화려한 색의 꽃밭을 많이 봐왔지만 바다를 배경으로 너른 꽃밭을 보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관람객을 위해 조성한 정원이긴 하지만, 이 세상에 오로지 나와 홍도원추리만 존재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 놀라운 풍경을 보러 온 사람은 나를 포함해 스무 명도 되지 않았다.

원추리는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진 식물은 아니다. 이에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원추리가 만개하는 한여름은 우리가 무더위에 산책을 마다하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식물원과 수목원에서 일하는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입장 관람객이 가장 적은 계절은 당연 겨울이지만 의외로 한여름에도 관람객이 무척 적다고 한다. 여름휴가를 떠나는 사람들은 무더위에 바다를 찾지 숲이나 들을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바다로 눈길을 돌리는 동안에도 숲과 들과 정원에서 원추리, 무궁화, 비비추 그리고 수많은 여름 식물들이 꽃을 피운다. 이것은 내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여름 산책을 자꾸만 나서는 이유다. 그렇게 식물은 뙤약볕의 남도로 나를 떠밀었다.

며칠 전에 읽은 손흥민 선수의 아버지 손웅정 감독의 인터뷰에서 ‘오늘의 행운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는 이야기가 마음에 남았다. 나는 식물을 보고 온 날 밤 잠에 들며 오늘 밖으로 나서길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움직이지 않았다면 이 다채롭고 놀라운 식물 풍경들을 보는 행운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더구나 식물은 내일까지 나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내일은 꽃이 져 버릴 수도, 비와 바람에 꽃잎이 다 떨어져 버릴 수도 있다.

홍도원추리 그리고 또 다른 여름꽃들 역시 매년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을 것이다. 지난 두 해 동안 코로나가 식물 축제를 문 닫게 하고 산불이 숲을 하얗게 태웠듯, 우리에게는 예측하지 못하는 재해가 늘 주어지기 마련이다. 올여름에는 우리가 놓쳤던 수많은 여름꽃들을 만나는 행운을 누리길 바란다.

<식물 세밀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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