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되짚어 본 광주·전남 아·태전쟁 유적] 영문도 모른채 끌려와 강제 노동 … 구타·굶주림에 ‘고통’
2025년 03월 16일(일) 20:05
진상규명위 발간 ‘구술집’ 기록 생생
전국서 수백명 청년들 강제 징병
하루 3교대로 8시간 씩 굴 뚫는 작업
임금도 못받고 천막에서 고달픈 나날

고하도의 옛 일본군 막사 건물 뒷편에 뚫린 물자 보관 및 대피용 동굴 입구.

목포 고하도에서 이뤄진 ‘굴 파기’ 작업 과정에서는 조선인들의 눈물이 배어 있었다.

아시아·태평양 전쟁 말기 노동력 부족을 겪던 일본군이 전국 각지에서 청년들을 강제 징병하고 머나먼 타향 고하도로 보내 강제 노동을 시킨 것이다.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가 발간한 구술집 등에 따르면 당시 고하도 굴 파기 작업에 동원됐던 이들은 변변한 교육도 못 받고 농사를 짓고 살다 영문도 모르고 군사훈련을 받은 뒤, 기차를 타고 목포 섬까지 내려와 일본군의 가혹 행위를 받으며 작업을 했다고 증언했다.

충북 청주시 출신인 송재섭씨는 1944년 목포 소재 고사포대에 입영했다가 이듬해 고하도 고사포대로 동원됐다.

입대 이전 농삿일만 했던 송씨는 20세 때 일본군의 징병에 끌려갔다. 용산 훈련소로 끌려간 송씨는 ‘4개월만 훈련 잘 받으면 집에 보내준다’는 일본군의 말을 듣고 훈련에 임했으나, 훈련이 끝나자 일본군은 “대동아 전쟁터에 배치될 것”이라며 송씨를 기차에 태웠다.

고하도의 북서부 ‘용머리’ 해안에서 외해(外海) 방향으로 굴착된 주정기지.
송씨가 도착한 곳은 목포 유달산. 미군이 점령해 오면 목포가 미군 배가 들어오는 길목이 된다니 단숨에 굴을 수백개 뚫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달산 작업을 한 뒤에는 고하도로 끌려가 굴 파기 작업을 계속해야 했다.

송씨는 “민간인들도 동원됐는데 하루에 구멍 세 개를 못 뚫으면 일본군이 개 패듯 패댔다. 다 안 뚫었다고, 못 뚫었다고”라며 “그걸 보니 눈물이 나오더라. 꼭 우리 형들 같은 이가 끌려가서 그렇게 당할지도 모르는데 그것 참 안타까웠다”고 회상했다. 작업자들은 일본 군인 1명의 감시를 받으며 하루 3인 1조 2교대로 작업에 동원됐으며, 하루에 2~3m 씩 삽과 곡괭이로 파고들어가는 작업을 하는 식이었다. 작업은 밤에도 흐릿한 가스등 불빛에 의지해 가며 계속해야 했으며, 월급조차 받지 못한 이들이 대다수였다.

굴을 파던 당시 상황은 전북 순창군 출신으로 1945년 고하도 붙어 있는 허사도로 동원된 이판석씨의 증언에 자세하게 드러나 있다. 이씨는 정읍에서 집결해 조선인 300명이 모여 목포로 이동한 뒤, 밤낮으로 3교대, 하루 여덟 시간씩 굴을 파는 일을 반복했다. 곡괭이 등으로 굴을 뚫을 위치에 남포(도화선 장치를 달아 폭발할 수 있게 만든 다이너마이트) 구멍을 뚫으면 기술자들이 폭탄을 넣고 터뜨렸다.

이씨는 “(폭탄을 터뜨리고 나면) 그 이튿날 우리가 싹 치워버리고 다시 굴을 파고 그랬다. 그러면 고무신같이 생긴 배를 그 안에다 넣어 보고 맞는지 보면서 며칠씩 일했다”며 “월급은 아무것도 없었다. 돈이라고는 일원 한 푼 없었다”고 했다.

고하도 내에 있는 옛 일본군 막사 건물.
전북 김제군 출신으로 1945년 4월 고하도로 동원된 조양식씨는 “음식이 부족했으며 일을 너무 많이 시키고, 구타 등 가혹 행위가 빈번히 일어났다”는 등 가혹한 작업 환경에 대한 증언을 남겼다.

조씨는 “밥 하는 사람(취사병)들이 국과 밥을 해 주면 한 그릇씩 똑같이 퍼서 먹었는데, 식사량이 적었다”며 “일본군 소대장은 내가 말대꾸한다, 일 안한다면서 때리기도 했다. 잠은 근처에 천막을 지어 놓고 잤는데, 천막에서 자는 사람들은 한 200명이고 다 조선인이었다”고 했다.

/목포=글·사진 유연재 기자 yjyou@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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