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서 흐즈르(Hizr·선지자)를 봐야 바흐시(Bahshi)가 됐습니다. 이 예언자는 꿈꾸는 이에게 ‘(직업을)머리로 줄까, 입으로 줄까’라고 묻습니다. 그 질문에 ‘입으로 주세요’라고 대답했던 사람들이 바흐시들입니다. ‘머리로 달라’고 응답한 사람은 두뇌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이 됐죠.”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서 만난 쇼미르조 뚜르디에프(55·베루니 동방 연구소) 교수는 “우즈베키스탄 바흐시들은 꿈에서 예언자를 만나 그 길을 걸었다”고 했다. 이 직업의 역사는 10세기, 혹은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설도 있다.

바흐시는 우리 말로는 ‘음유시인’ ‘구연자’(口演者)에 해당한다. 판소리 처럼 창(소리)·아니리(사설)·발림(몸짓)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우리의 리듬 악기가 북이라면, 그들은 만돌린을 닮은 돔비라(dombira)를 연주한다.

한국 사람들이 할머니, 할아버지 등 가족으로부터 신화, 전설 민담을 들었다면, 중앙아시아에서는 전문적인 직업군인 바흐시가 이야기의 전달자였다.

중앙아시아에서 전해지는 영웅 서사시, 전설·설화, 민담에서 이들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 이들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를 듣고 글로 옮긴 것이 ‘알마피시’, ‘구루글리’ ‘잠세트남’ ‘바르주남’ 등 중앙아시아 영웅서사 문학(다스탄·Dastan)의 모태다.

중앙아시아 각국에서 바흐시를 부르는 이름은 달라도 역할은 같다. 우즈베키스탄의 카쉬카다리여(kashkadaryo) 지역에서는 ‘유즈버쉬’(yuzbosh), 사마르칸트에서는 ‘서키(soki)’라고 부른다.

바흐시들은 대상(隊商)이 머무는 마을 공터, 시장, 사원 등지에서 공연을 했다. 이들의 재치있는 입담과 연주를 통해 중앙아시아 민족들은 자신의 뿌리를 찾고 삶의 애환을 달랬다.

‘바흐시’ 하이토브 자파르(27)씨는 “신화와 전설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고난과 역경, 사랑, 삶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이들을 위로하는 것이 바흐시의 소명”이라고 말했다.

우리 판소리와 여러 모로 닮은 게 바흐시다. 철저하게 도제식으로 배우고, 1인 창자가 장시간 완창하는 것도 판소리와 비슷하다. ‘구루글리’라는 영웅신화는 60권의 책으로 묶어있으며, 100여쪽 분량의 1권을 구연(완창)하는 데만 무려 사흘이 걸린다고 한다.

소리를 내는 방식은 다르다. 판소리는 내지르는 소리지만, 바흐시는 목을 눌러 웅얼거리듯이 이야기한다. 바흐시는 마치 랩퍼처럼 돔비라에 이야기를 얹어 풀어놓는다.

전설적인 바흐시인 에름가씨 주만불불 오글리의 경우 모두 120개 레퍼토리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고 전해진다.

이 전문적인 이야기꾼들은 지금도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의 결혼식에 초청돼 공연한다.

바흐시는 한때 명맥이 끊길 뻔 했다. 우즈베키스탄을 병합한 구소련이 부족과 민족을 위기에서 구해낸 영웅들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바흐시들을 추방하고 공연을 금지한 때문이다. 불온한 사상을 전파한다는 이유였다.

쇼미르조 뚜르디에프 베루니 동방 연구소 교수는 “우즈베키스탄이 지난 1991년 독립한 뒤 민족정신의 전달자인 바흐시들의 명맥을 되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며 “현재 우즈베키스탄에서는 국가가 지원하는 바흐시 콘테스트를 통해 전수자를 찾고, 그 명인들을 ‘국민 바흐시’로 지정해 창작을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타슈켄트=윤영기 기자 penfoot@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