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아름다움과 다른 사람을 비교하느니, 미의 여신에게서 흠결을 찾는 것이 낫겠구나. 너의 사랑을 얻지 못하면 무덤에 누워 숨쉬지 않으리. 시간을 다오 적들의 무덤이 만들어질 시간을….”(정혼녀 바얀술루를 그리워하는 코지 코르페시의 독백)

서사시 ‘코지 코르페시와 바얀 술루’는 카자흐스탄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불린다. 하늘이 맺어준 인연을 갈구하는 이들의 사랑은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절세미인인 여주인공 바얀술루는 정혼자를 살해한 적을 죽이고, 연인과 저승길을 함께하는 사랑의 화신으로 묘사된다.

카자흐스탄 동부지역 탄시크 마을에 있는 이들의 묘지는 지금도 연인들이 사랑을 맹세하는 성지다. 취재진이 답사한 이들의 묘지(높이 11.65m)는 이루지 못한 사랑의 염원을 담고 우뚝 솟아 있었다. 자잘한 풀들만이 있는 스텝지역에 있는 묘지는 척박한 삶에서 사랑을 일궈낸 이들의 지난한 삶을 대변했다.

코지 코르페시와 바얀술루의 이야기는 15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극적인 운명은 부친들의 잘못된 만남에서 시작된다. 거대 농장주였던 카라바이(88)와 사리바이(75)는 사냥터에서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된다.

사리바이는 카라바이의 꾐에 빠져 쌍둥이 새끼를 임신한 사슴을 죽인 뒤, “딸과 아들을 얻으면 서로 결혼시키자”는 유언을 남기고 사냥터에서 숨진다.

간교한 카라바이는 친구의 죽음 앞에서 달콤한 거짓말을 한다. “적에게 나는 말라버린 샘이지만, 친구에게는 물이 찰랑거리는 샘이지. 걱정 마, 맹세를 어기지 않겠다.”

거짓말처럼 88세 노인 카라바이는 딸 바얀술루를 얻고, 사리바이의 어머니는 아들 코지 코르페시를 낳는다. 카라바이는 기다렸다는 듯 “고아에게 딸을 줄 수 없다”며 정혼의 약속을 저버리고 자신이 살던 발탈리 바가날리 지역을 떠나버린다.

유유상종이라 했던가. 카라바이는 9만 마리의 가축을 몰고 황야를 헤매다 가축들이 몰살될 지경에서 흉포한 악한 코다르의 도움으로 위기를 벗어난다. 카라바이는 자신의 성격을 빼닮은 코다르를 바얀과 결혼시키기로 결심한다.

서사시에 묘사된 악한 코다르의 인상은 이렇다. “사람들이 보면 저절로 고개를 돌리게 되는 흉측한 얼굴, 어깨 넓이가 무려 2.16m, 주먹은 마치 떡갈나무 같다.”

실낱 같던 코지-바얀(두 사람의 애칭)의 운명은 우연히 코지가 자신의 정혼자가 있음을 알게 되면서 부터 다시 이어진다.

사랑에 눈이 먼 코지는 어머니까지 등지고 바얀을 찾아 떠나기로 결심한다. 코다르에게 죽게될 아들의 운명을 예감한 어머니의 만류가 절절하다.

‘코지코르페시와 바얀술루’ 서사시는 카자흐스탄 정부가 지원하는 문화상품이다. 국립 아카데이먀 극장의 대표적인 연극이다. 카자흐스탄 아우에조프 문학·예술 연구소, 교육문화부의 역작 ‘카자흐 민담 전집’(100권)에 수록돼 있다. 바흐시(구연자) 채록본과 구전 이야기가 30여종에 달하고, 19세기 러시아어로 번역돼 해외에 알려졌다.

“나의 아들, 열병에 걸린 듯 타오르고 있구나. 어머니의 백발로 말하겠다. 고향 땅을 떠나지 말라. 피할 수 없는 이별을 생각만 해도 내 눈은 쓰디쓴 눈물로 가득 차 오른다. 너는 결국 죽게 될 것이다”

짝을 그리워하는 코지는 귀를 닫는다. “우리 인생의 아침은 그리 길게 지속되지 않습니다. 황혼이 오면 그것들이 무슨 쓸모가 있습니까.”

14살 코지가 일전불사를 벼르지만, 연적(戀敵) 코다르는 더 강해진다. 바얀의 미모에 반해 각지에서 청혼을 위해 찾아온 90명의 무사를 제압, 이들을 모두 부하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코다르가 결코 갖지 못한 지혜의 소유자 코지는 바얀이 머물고 있는 아야구즈 지역의 유목지에 도착, 선지자에게 배운 변장술을 동원한다. 볼품없는 목동으로 변신해 바얀과 연정을 나눈다.

청년이 될 때까지 유목지에서 자신의 신분을 숨기던 코지는 코다르를 일격에 제압, 90명의 부하들까지 굴복시키고 꿈에도 그리던 바얀과 결혼을 앞둔다.

그러나 연적을 차마 죽이지 못하고 자비를 베푼 코지는 사경에 빠진다. 코다르가 바얀의 아버지 카라바이와 공모, 코지를 잔칫집으로 끌어들인 뒤 독을 탄 술을 먹인 것이다.

무사 코지는 바얀이 보낸 친구들 덕분에 독약을 마시고도 목숨을 건진 뒤 깊은 산속에 몸을 숨긴다.

야속하게도 신이 그에게 허락한 시간은 짧았다. 악명 높은 마을의 한 노파를 통해 코지의 은신처를 알게 된 코다르는 잠들어 있는 코지의 목을 벤다.

카자흐스탄 동부지역 탄시크 마을에 있는 코지코르페시와 바얀술루의 무덤.

두 사람의 비극적인 사랑을 보다 못한 여신(女神)이 거들고 나선다. 연인의 주검 앞에서 통곡하는 그녀에게 여신은 “코지를 되살려 3년 동안 살게해주겠다”고 제안한다. 유한한 사랑이 슬픈 바얀은 단지 3일만 코지를 살려줄 것을 간청, 꿈같은 사흘을 보낸 뒤 그와 영원히 이별한다. 바얀은 그를 키질 키이(현재 탄시크 지역) 근처에 묻는다.

오뉴월에 서리를 불러오는 여인의 복수가 시작된다. 바얀은 자신이 병든 것처럼 위장, 병을 낫게 해주는 사람과 군말 없이 결혼 하겠다고 선언한다. 코다르를 꾀어내기 위한 속셈이었다.

“내 병이 완쾌되는 꿈을 꾸었는데, 우물 속에서 차거운 물을 마셔야 한데요. 그 물을 양동이가 아니라 모자로 퍼야 해요. 나를 위해서 우물 밑바닥으로 내려가 물을 떠줄 분이 없는가요?”

눈이 뒤집힌 코다르는 자신이 적임자라고 자청, 바얀의 땋은 머리를 밧줄 삼아 잡고 우물로 내려간다. 바얀은 가위로 자신의 머리를 자르고, 장정들에게 돌을 던지도록 해 그를 생매장해버린다.

바얀은 코지의 무덤에 비석을 세우고 묘역을 조성한 뒤 칼로 자신의 심장을 찔러 자결한다. 무덤가에 두 송이 향기로운 꽃이 자랐다고 한다.

/카자흐스탄=윤영기 기자 penfoot@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