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문명을 응징하기 위해 파견된 신의 채찍’

13세기∼14세기 칭기즈칸과 아미르 티무르가 이끄는 중앙아시아 유목 전사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유럽은 도대체 알 수 없는 이들의 막강한 군사력을 이렇게밖에 정의할 수 없었다. 훗날 르네 그루쎄는 저서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에서 “물질문명에서 뒤졌던 유목민에게 군사적 우위를 가져다주었던 기술무기는 숙련된 궁수들로 구성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기동력을 가진 기마군대였다”고 설명했다.

홀연히 나타나 유럽을 순식간에 공포로 몰아넣은 기마 전사들의 삶에서 말(馬)은 물아일체라는 설명으로는 부족하다. 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 유목민들의 격언에서 말의 존재적 가치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우리는 황야에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부자들이 챙겨야할 복잡한 격식과 예의가 없다. 우리가 가장 값지게 여기는 것은 말이고, 음식은 말고기, 즐겨먹는 술은 마유주(馬乳酒·말 젖을 발효시킨 술)다.”

카자흐스탄의 경제수도 알마티 중앙시장에서는 자그마한 할인점 크기의 말고기 코너를 볼 수 있다. 여느 시골길의 간이 식당에서도 어김없이 쿠미즈라 부르는 마유주를 판다. 약간 시큼한 요구르트 맛이다.

카자흐스탄에는 아이가 태어나면 선물로 어린 말 한 마리를 주는 풍습이 있다. 아이가 좋은 운명을 타고나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 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 말에는 누구도 올라탈 수 없으며, 파는 것은 금기다. 아이는 4, 5살이 되면 본격적으로 말타기를 배우고, 성인이 되면 말을 선물로 받는다.

이쯤 되면 “노르웨이 아이들이 스키를 신고 태어나듯 유목민의 자식들은 말타는 법을 타고 난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다.

중앙아시아에는 말이 등장하는 신화와 전설, 설화, 민담이 유독 많다. 카자흐스탄을 대표하는 이야기는 ‘케르굴라를 탄 켄데바이’다. 줄거리는 켄데바이와 말인 케르굴라가 마법의 세계에서 악과 싸워 승리를 거두고 민중을 해방시키는 내용이다.

카자흐스탄 아우에조바 문학·예술연구소장인 카스카바소브는 “민담에서 말이 중요한 조력자로 등장하는 것은 그만큼 유목민의 삶에서 말이 차지하는 위치가 중요하다는 의미”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그런 만큼 켄데바이와 애마의 인연은 각별하게 그려진다. 타고난 무사인 켄데바이는 우연히 늑대의 공격을 받고 있는 야생마를 구해준다. 켄데바이는 치명적인 상처로 숨진 말의 뱃속에서 새끼를 꺼내 케르굴라라 이름짓고 얼룩말의 젖을 먹여 키운다.

이 말은 날아가는 새를 쏜살같이 달려가 입으로 잡아낼 정도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준마였다.

타고난 궁수 켄데바이와 케르굴라는 사냥으로 이름을 날렸고, 사람들은 이들을 ‘케르굴라를 탄 켄데바이’라고 불렀다.

의협심이 유독 강한 켄데바이는 불우한 양치기 소년의 신세 한탄을 듣고 모험에 나선다. 소년은 “부모가 악마들에게 인질로 잡혀가 고아 신세가 됐다”고 울먹인다.

켄데바이를 태운 케르굴라는 다섯번의 도약으로 악령들의 은거지에 도달한다. 보통 말이 6개월을 달려야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카자흐스탄 알마티 중앙시장의 말고기 정육점.

악령의 은거지에서 케르굴라는 신기하게도 인간의 말을 한다. “내 친구 켄데바이. 이 산을 넘으면 악령의 두목이 살고 있어. 이제 헤어져야 할 시간이네. 내 꼬리에서 털을 한 가닥 뽑아 가지고 있게.”

여기에서 언급되는 ‘꼬리 털’은 동물의 꼬리·뼈, 새의 깃털에 마술적인 힘을 부여하는 카작 민담의 특징을 보여주는 소재다. 이들의 마술적인 힘은 반드시 대상물을 태울 때 나타난다.

켄데바이가 천신만고 끝에 만난 악령의 수괴는 뜻밖의 제안을 한다. “내가 가진 검은 암말이 비단 털, 황금색의 꼬리, 날개달린 망아지를 낳자마자 빼앗아가는 괴조(怪鳥)를 잡아주면 원하는 소원을 들어준다”는 것이었다.

괴조의 보금자리를 찾아가던 켄데바이는 불바다를 만나자 애마 케르굴라가 남긴 꼬리털을 태운다. 거짓말 같이 나타난 애마는 그를 태우고 불바다를 건넌다. 그 바다 한 가운데 있는 섬에서 먹이를 먹고 있는 말들을 만난다.

예지자인 케르굴라는 또 다시 입을 연다. “이 곳은 거대한 쌍두 독수리 삼루크의 은거지야. 구유를 훔쳐 달아나면 말들이 뒤를 따를 거야. 그러나 말들은 불바다를 건널 수 없어 우리가 가야하는 다른 길에는 세 가지 장애물이 있어.”

이 세 가지는 전 세계 신화나 민담에서 시련, 관문의 형식으로 등장하며 통과의례를 상징한다. ‘케르굴라…”에서는 일곱 개의 눈을 가진 거대한 괴조와 사자, 교활한 마녀 바바-야가가 그들이다.

켄데바이는 수백㎏짜리 몽둥이로 괴조를, 다이아몬드 검으로 사자를, 미녀로 둔갑한 바바-야가의 목을 베어버린다.

켄데바이로부터 황금꼬리를 가진 말을 건네받은 악령의 수괴는 다른 조건을 제시하며 약속 이행을 미룬다.

“내 황금 망아지를 훔쳐가는 괴조 삼루크를 잡기 위해 너를 불렀다. 네가 그냥 오지 않을 것 같아 너의 부족마을을 침략했고, 무사들을 인질로 잡아들인 것이다.”

“너의 민족을 해방시키고, 네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괴조, 사자, 바야-야가의 목을 가져와야 한다.”

켄데바이에겐 어렵지 않은 일. 이미 그들을 제압한 켄데바이는 말 안장에 묶어두었던 주머니에서 괴조의 눈, 사자의 송곳니, 바야-야가의 목을 꺼내 보여줘 악령의 수괴를 감동시킨다.

켄데바이의 용맹에 감동한 악령의 수괴는 자신의 딸을 그와 결혼시킨 뒤, 감금했던 무사, 약탈했던 가축들을 모두 돌려준다.

고향으로 금의환향한 켄데바이는 민중들의 추대에 의해 왕에 올랐고, 자신의 왕국을 ‘케르굴라를 탄 켄데바이’라고 불렀다.

/카자흐스탄 윤영기기자 penfoot@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