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될 수 있는 한 멀리해야 할 곳이 두 군데가 있다고 아내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하나는 병원이고 다른 하나는 법원이라며 필자의 표정을 살폈다. 왜냐고 물으니 그곳에서는 사람 대접을 제대로 받을 수 없고 자기 이름도 없이 환자, 피고, 원고로 불린다고 했다. 듣고 보니 일리가 있는 말이다. 과거보다는 친절해졌다고 해도 병원이나 법원 가는 일은 아직도 고역이다.

병원에 가면 없던 병도 생기는 것 같고, 법원의 소환장을 받아든 후에는 밥맛도 없어지고 소화도 잘되지 않으며 잠도 오지 않는다고 한다. 한평생 살아가면서 병원에 갈 필요 없이 건강하고 법원에 출입할 만한 분쟁이나 송사를 겪지 않고 지낼 수 있다면 그 또한 행복한 인생일 것이다.

법원을 직장으로 삼는 법관에게도 직업이 주는 압박과 고단함이 크다. 분쟁해결이 직무인 법관은 어쩔 수 없이 분쟁의 한가운데에 서 있을 수밖에 없다. 법관은 분쟁이 몰고 온 상처 난 가슴, 깨어진 감정, 적대감, 불신, 무지, 헛된 욕심 등에 그대로 노출돼 영향을 받는다. 분쟁에 직면해 합리적인 해결방법을 찾았다고 하더라도 씁쓸함을 경험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형사재판을 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굳이 알 필요 없는 인간의 극단적인 상황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밖에 없다. 만약 교사가 됐다면 희망에 차고 순수한 젊은이들을 만나면서 한평생을 살 수도 있으련만, 끔찍한 범죄자들을 만나서 그들의 범죄의 양을 저울질하고 혹시나 모를 남용된 권력의 그림자가 있는지 살피는 것이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니다.

하던 일을 멈춰 세상을 잊고 자신을 충전할 수 있는 취미를 가지는 것이 법관에게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취미는 분쟁의 톱니바퀴에서 잠시 벗어나 숨을 쉬면서 한 발짝 멀리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한다.

최근 동료 판사의 권유로 합창 연습을 하고 있다. 연말 행사로 조그만 음악회를 개최하고 수익금을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쓴다고 하니 용기를 내 참가하게 됐다.

반복되는 빡빡한 일상에서 벗어나 조금은 새롭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은 욕구가 작용한 듯하다. 초등학교 시절 잠시 교내합창단에 속해 있었던 것이 필자 음악경력의 전부이고, 바쁜 시간에 틈을 내 연습하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여럿이 소리를 내어 고운 화음을 만들어 내는 신기함에 힘든 줄을 모르겠다. 처음에는 소리 내는 것 자체가 어려웠지만, 자꾸 연습하다 보니 음정도 익숙해지고 성량도 넉넉해진다. 모든 구성원이 웃으면서 열중하다 보면 연습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모두가 음악으로 하나가 되니 참 즐겁고 유쾌하다. 연습을 마치고 구내식당에서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는 점심도 같이해서 좋다.

합창은 모든 파트가 두드러짐 없이 조화롭게 어울려야 소리가 아름답다. 꽃으로 치자면 화려하게 핀 한 송이 장미라기보다 수수하지만 뭉텅이로 피는 수국이나 각각의 색깔을 갖고 있지만 색이 함께 어우러져 화사한 코스모스 같다고 할까. 작은 감자들이 넝쿨이 돼 주렁주렁 매달린 풍성함이 어우러진 합창의 아름다움이다.

음악은 신의 언어라고 한다. 음악은 말이 없이도 서로를 느낄 수 있게 한다. 음악은 영혼을 고양하고 우리를 아름다움 속에서 기쁨과 평화로 이끈다. 인종, 언어, 문화, 계층, 성별 등을 초월해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 음악이다. 음악은 갈등과 분쟁의 벽을 넘어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는 힘을 가지고 있다.

올해를 마감하는 이때, 가난하고 상처 입은 영혼에 위로와 기쁨을 줄 수 있다면, 그리고 일에 지친 사람들에게 휴식과 출발의 새 기운을 선사할 수 있다면…. 야무진 기대와 희망으로 법원 합창단 연습의 밤도 깊어간다.



〈광주지방법원 민사4단독 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