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한 손님이 올 것이다.’

서기 48년 7월29일. 가락국(가야)을 세운 김수로 왕은 잠결에 하늘의 계시를 받는다. “손님을 맞으라”는 왕명을 받은 신하 유천간이 경남 창원의 망산도 앞바다쯤 이르자 아름다운 배 1척이 해안으로 들어왔다. 배에선 내린 15명의 얼굴은 뜻밖에 모두 검은 색이었다. 일행이었던 한 소녀가 고한다.

“나는 아유타 왕국의 공주다. 부왕께서 나를 수로 왕께 보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우리나라 최초의 다문화 부부(?)가 된 김수로 왕의 부인 허왕후(허황옥, 32∼189)에 대해 이렇게 썼다. 수로왕은 그해 16살 이국의 소녀와 결혼하고, 150년간 가야를 통치하며 10남2녀를 뒀다. 아들 둘은 어머니의 성을 따 허씨가 됐다. 이들은 김해 김씨, 김해 허씨, 인천 이씨의 시조로 남았다.

2000여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1997년. 가락중앙종친회(김해김씨 종친회)는 당시 종친회장인 김종필 국무총리를 필두로 시조찾기에 나선다. 이들은 인도 북부 우따르쁘라데쉬주에 있는 아요디아(Ayodhya)를 주목했다. 아유타와 가장 비슷한 지명을 갖고 있기 때문. 김해김씨의 후손들은 아요디아에서 그 지방의 터줏대감인 미쉬라(MIshra) 왕조의 후손과 조우한다. 그리고 가야의 국가 문장이었던 쌍어(雙漁)를 현지의 사원에서 발견한 종친회는 확신을 갖는다.

힌두교 성지로 유명한 바라나시에서 북쪽으로 150여㎞ 떨어진 아요디아는 우리나라 군 단위 규모의 도시다. 힌두교 라마신의 탄생지인 아요디아의 번화가 중심에서 16만5300㎡(5만평) 규모의 라즈사단(RajSadan) 석조궁전이 위용을 드러냈다. 미쉬라 왕조는 100년이 훌쩍 넘었을 듯한 이 궁전에서 20여 명의 대가족을 이룬 채 살고 있다. 광주일보 취재진을 맞은 첫 마디는 “형제들이여 환영합니다”였다. 궁전의 거실 장식장에는 한국 방문 시 받은 감사패와 기념품을 소중히 보관중이었다.

사실관계부터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가족의 수장인 빔렌드라 미쉬라(57)는 “미쉬라 왕조의 역사는 300년밖에 되지 않았다”며 “허왕후에 대한 이야기도 한국에서 찾아온 인사들이 들려줘 처음 알게됐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이어 “처음에는 한국인들의 얘기를 듣고 믿지 않았지만 김 총리가 당신들이 이곳 왕조의 후손이니 허왕후의 피가 흐르고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고 했다.

인도의 역사에는 허왕후에 대한 얘기가 없었다는 말이다. 얼굴색이 하얀 아리안 혈통의 미쉬라 왕조는 인도의 북쪽이 고향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다만 미쉬라는 “기원 200년 전 불교를 국교로 삼은 아쇼카 대왕이 불교를 퍼뜨리기 위해 스리랑카와 티베트, 말레이시아까지 왕자와 공주를 보냈다 ”며 “허왕후도 가야에 불교를 전파하러 가지 않았을까”라고 추정했다.

가야와 인도를 잇는 과학적인 뒷받침이 있긴 하다. 김해 허왕후릉에 보관된 파사석탑의 재질은 실제로 인도에서 나는 돌로, 우리나라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허왕후는 가야를 오던 중 풍랑을 막기 위해 불법(佛法)에 의지해 이 파사석탑을 가져왔다. 가야와 인도를 연결하는 유일한 증거물이다.

신화와 현재를 넘나드는 이야기는 지금도 진행중이다. 가락중앙종친회는 지난 2000년 한국의 대리석으로 만든 허왕후 유허비(遺墟碑)를 아요디아로 가져갔다. 2000여 년이 흘러서야 이뤄진 파사석탑의 답례. 집에 보관하던 미쉬라 가족은 이를 정부에 알렸고, 인도 정부는 아요디아의 패자바드 사류(Saryu)강 옆에 유허비를 모신 ‘가락공원’을 탄생시켰다. 지난 2001년 3월 제막식을 가진 뒤 김씨종친회는 매년 2∼3월 이곳을 찾아 미쉬라 가족과 기념식을 갖는다. 이후 500여 명의 ‘김씨’와 ‘허씨’들이 멀고 먼 할머니의 땅을 방문했다.

지난 2011년 인도 프라티바 파틸 대통령이 방한 당시 김해김씨 후손인 영부인 김윤옥 여사는 “내게도 인도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말했고, 정부는 경제협력관계를 맺는 등 양국 관계를 돈독히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김병호(68) 가락중앙종친회 상임이사는 “아유타를 단서로 아요디아를 찾았고, 종친회가 매년 이곳을 찾으면서 멀고 먼 나라였던 인도와 한국을 잇는 가교가 됐다”면서 “역사는 만들어가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인도 아요디아=임동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