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죄추정의 원칙, 참 쉽고도 어려운 개념이다. 더욱이 1789년 프랑스혁명의 산물로 설명되는 그 배경을 찾아보노라면, 소설이나 영화에서 ‘원님 재판’과 ‘고문’으로 묘사돼 온 우리의 형사재판 역사와 대비돼 괜한 씁쓸함마저 느껴지곤 한다. 그런데 얼마 전 동료 판사들과 중종 실록에 수록돼 있는 ‘용산강 근처에 발이 잘린 아이가 버려진 사건’에 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이 상세히 기술돼 있어 과연 누가 진범인지 다양한 의견을 주고받았는데, 그 후 사건의 전말이 궁금해 전문(http://sillok.history.go.kr)을 찾아보던 중 프랑스혁명보다 250여 년이나 앞선 그 1533년도의 기록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됐다.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중종 28년(서기 1533년) 2월, 한성부 용산강 근처에서 두 발이 잘린 채 버려져 있는 5∼6세가량의 노비 여자아이가 발견됐다. 이 끔찍한 사건을 전해들은 중종은 의금부에 조사를 명했는데, 발목이 잘린 아이는 한덕이라는 사람을 범인으로 지목한 반면, 귀덕이라는 사람은 한덕의 집에서 나온 아이를 데려가 자신의 집에서 보살피던 중 동상으로 발이 빠졌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아이를 진찰한 의원은 아이의 발이 동상으로 빠진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의하여 잘린 것이 분명하다고 봤다. 과연 이 사건은 어떻게 처리됐는지 중종 실록의 해당 부분 중 4일치만을 발췌하여 요약했다.

〈중종 28년 2월18일〉

의금부가 “처음에는 상처받은 아이가 미욱하고 언어가 착란되어 믿을 만하지 못하게 생각되었는데, 지금 보니 말에 두서가 있어서 선후를 잃지 않습니다. 아이를 본부(本府)에 데리고 가서 자세히 묻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아뢰자, 중종은 “아이에게 자세히 물으려는 것은 혹시라도 미진한 일이 있을까 염려해서이지만, 지금은 사건의 정상이 이미 드러났으니, 다시 물을 필요가 없다. 만약 아이를 옮겨오면 바람을 쐬어 죽거나 중상을 입는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다”고 전교했다.

〈중종 28년 2월21일〉

의금부가 “여자아이가 분명히 한덕이 발을 잘랐다고 말하지만, 4∼5세의 미욱한 아이의 말만 믿고 형추(刑推)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율(律)에도 80세 이후와 10세 이전 사람의 말은 사실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고 아뢰자, 중종은 “발을 자르는 것은 잔혹한 것으로 세상에 드문 일이고 백성을 구휼하는 정사 중에 가장 먼저 할 일로 이 같은 어린아이를 구하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은 없다. 발이 동상으로 빠진 것인지, 칼로 자른 것인지 의술에 능통한 의원과 한성부의 낭관에게 다시 살피고 검사하게 이르라”고 전교했다.

〈중종 28년 2월29일〉

의금부가 “의원은 발을 자른 것이 명백하다고 하나, 동상으로 빠진 다른 이의 발을 살펴보니 역시 잘라서 끊어진 모양과 같았습니다. 의원의 말에만 의거하여 귀덕을 계속 심문하는 것이 사리에 어떻겠습니까?”라고 아뢰자, 중종은 “의원은 모두 잘라서 끊어진 것이라고 말하므로 귀덕 역시 추문하였으나, 유사(有司)하고만 의논해서는 안 되니 대신들과 의논하도록 하라”고 전교했다.

〈중종 28년 2월30일〉

영의정과 좌의정이 “귀덕의 집에 이른 후에 두 발이 떨어진 것을 보았다고 증언한 자도 있는데, 단지 미욱한 아이의 말만 듣고 큰 옥사(獄事)를 만드는 것은 부당한 듯합니다. 의심스러운 옥사는 끝까지 밝혀 내지 않더라도 해로울 것이 없을 듯합니다”고 아뢰고, 우의정이 “이런 의심스러운 옥사는 끝까지 추문하더라도 실정을 알지 못할 것이요, 오히려 귀덕이 무고하게 죽을 폐단까지 있습니다. 더구나 동상에 걸려 발이 빠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고 아뢰자, 중종은 “귀덕의 공사는 근거가 없으니 추문하지 말라”고 전교했다.

양천제가 확립된 조선 중기 신분사회에서 발생한 노비 여자아이의 유기 사건을 가리켜 중종은 “백성을 구휼하는 정사 중에 가장 먼저 할 일로 이 같은 어린아이를 구하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은 없다”고 한다. 또한, 피해자와 용의자의 진술이 엇갈리는 상황에서 중상을 입은 피해자인 아이를 조사하는 데 주력하기보다는 아이의 건강이 악화하지 않도록 보살피며 목격자들을 먼저 탐문하는 방법으로 실체적 진실을 밝히고자 노력한다. 나아가 통상 유도신문이나 암시에 의하여 변용되기 쉬운 어린 아이의 진술을 선뜻 신뢰하지 않도록 한 당시의 법률은 20세기 초 독일을 중심으로 전개된 증언심리학의 연구결과와도 일맥상통하며, 감정인에 해당하는 의원의 의견을 청취함에 있어서도 신중함을 잃지 않는 모습이 눈에 띈다.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역시 한덕과 귀덕을 모두 석방해 무리한 옥사를 방지하고자 한 삼정승의 건의다. 당시 물건과 같은 취급을 받았던 노비들이라고 하더라도 함부로 추문하거나 유죄로 속단하고자 하지 않았던 위정자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무죄추정의 원칙은 서양 인권사의 전유물이 아니며, 쟁취하고 선언해야만 가질 수 있는 전리품도 아니다. 왕정과 신분제가 확립됐던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노비가 억울하게 처벌받는 일이 없도록 성심을 다했던 500여 년 전 선조의 모습으로부터, 오늘의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이상현 광주지법 파산2단독 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