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경력이 일천한 판사의 일상을 겉에서만 살펴본다(이하의 ‘그’는 필자가 아니다).

그는 출근해서 컴퓨터 전원 단추를 누르고 컴퓨터 운영체제 가동을 위한 비밀번호까지 입력한 후, 컴퓨터가 완전히 켜지는 짧은 시간을 이용해 옥상에서 담배를 두 개 피우고 온다. 담배를 피우는 동안 그는 왠지 웃고 있다. 곧 일을 시작해야 하지만 어쨌든 잠깐 쉬는 시간이니 기분이 좋아서 그렇게 웃는 것인지 아니면 무슨 다른 이유가 있는지 겉에서만 봐서는 알 수 없다. 그가 돌아올 즈음이면 컴퓨터는 이미 켜져 있다.

그는 캐비닛을 열고 사건기록 여러 개를 책상에 옮겨놓는다. 책상은 상당히 넓지만 가끔은 공간이 부족해 기록을 모두 올려놓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기록에는 당사자의 주장을 담은 서면과 그 주장을 뒷받침할 자료가 편철되어 있다. 서면에는 법률적으로 잘 정리된 주장이 담겨있는 경우도 있고 여러 번 읽어야만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주장이 담겨있는 경우도 있다.

이제 그는 손가락에 골무를 끼운다. 그는 오른손잡이지만 왼손에 골무를 끼운다. 자꾸 왼손을 써서 오른쪽 뇌를 자극하면 혹시 조금이라도 머리가 좋아지리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무슨 다른 이유가 있는지 겉에서만 봐서는 알 수 없다. 그는 기록을 읽으며 빈 종이에 펜으로 뭔가를 쓰기 시작하는데, 손으로 턱을 괴기도 하고(이때의 표정은 심각하다), 가끔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쥐어뜯기도 한다(이때의 표정도 심각하다). 점심을 먹으러 다녀올 때, 옥상이나 화장실에 다녀올 때를 빼고는 퇴근할 때까지 그의 일상은 앞서와 같다.

그의 일상을 조금 상세하게 살펴본다. 그가 시간을 어디에 투여하는지.

그는 당사자의 주장을 정리하고 자료와 대조하여 보는 일에 많은 시간을 보낸다. 사건에 적용되거나 참고로 쓰일 수 있는 대법원 판례와 하급심 판결례를 검색하는 일에도 많은 시간을 투여한다. 대법원 판례가 사건에 적용될 수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판단하는 일에도 많은 시간을 투여한다. 가끔 대법원 판례의 사정(射程)을 쉽사리 판단할 수 없는 경우 관련 문헌을 살펴보는 일에도 시간을 투여한다.

그는 갈증을 느낀다.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게으름이다. 이렇게 빈틈없이 시간을 써야 하는 그에게 게으름이 필요하다니 무슨 말인가? 어느 비교법학자가 비교법학자에게는 게으르게 지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쓴 표현을 옮긴다. “사실은 당연히 내가 생각하는 게으름이라는 용어는 할 일 없는 시간이 주는 기회라는 의미에서의 여가이다. 그리고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기회는, 생각할 수 있는 기회, 반성할 수 있는 기회, 토론할 수 있는 기회이다.” 어쩌면 그는 사건을 처리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투여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는 스스로 평가함에 있어서 ‘숙달됨’과 ‘민첩함’에만 가치를 두고 있는지 모른다.

그는 법과대학 시절 선생님으로부터 판사는 외로움을 견뎌야 한다고 배웠다. 그는 선생님으로부터 그가 견뎌야 하는 외로움이 어떤 종류인지까지는 배우지 못하였다. 그 선생님께서, 시간이 없어서든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는 쉽사리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없는 외로움만을 가르치신 것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 외로움은, 당사자가 아닌 판사로서는 기록을 반복해서 읽더라도 법적 분쟁의 배후에 놓인 진정한 분쟁의 실체를 알기 힘들다는 절망감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또한 외로움을 견디기 위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가 갈증을 해결하고 용기를 갖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그가 언젠가 “단 하나의 사건을 다룸으로써 어떠한 법제도에 대하여 책공부나 스스로의 사색에 의하여서는 결코 달성하지 못하였던 살아있는 직관을 얻게 되었다는 경험”을 하게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