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초, 사무실을 상무지구 가정법원 근처로 이전하였다. 전면 유리창을 통해 시청 청사와 평화공원이 바로 보이는 덕분에 사무실에 들어서면 일단 기분이 좋다. 이 사무실에서 나는 많은 사람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적절한 상담을 하며, 가져온 증거들을 검토하거나 서면을 작성한다.

그러다 간간이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면, 평화공원 벤치에 젊은 남녀가 다정히 앉아 진한 애정표현을 하는 것을 목격하기도 하며, 또 어느 날은 대학시절 상당기간 동안 거의 매일 들었던 운동가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기도 한다. 점심시간이면 인근 빌딩에서 쏟아져 나온 직장인들이 몇 사람씩 무리를 지어 공원 산책을 즐기며 담소하기도 한다. 참으로 고마운 공간이다. 가정법원에 합의이혼 신청을 하러 갔다 위자료 액수 등 의견이 달라 싸움만 하고 신청은 무산되어 지친 심신을 이끌고 씩씩대며 공원을 건너 우리 사무실로 오게 하는 징검다리이기도 하다.

평화는 누구나 원하는 것이고 행복과 가까운 단어이다. 그런데 이 평화라는 말을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환경적·기질적으로 자연스럽게 평화로운 일생을 살게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늘 주위의 공격과 비난과 분쟁을 스스로 막아내고 다투어야만 평화를 쟁취하고 누릴 수 있는 사람도 있다. 변호사 업무는 주로 후자그룹의 사람들과 이루어지기 때문에, 변호사로서 생각하는 평화는 분쟁과 갈등 후의 평화이다.

몇 달전, 한 여자분이 찾아와 협의이혼 후 아들을 혼자 양육하고 있는데 교육비 부담이 너무 커져서 애 아빠를 찾아 양육비를 받고 싶다고 하셨다. 애아빠와는 연락이 두절된 지 13년도 넘었고 우연히 한 번 길에서 보았을 뿐 사는 곳도 하는 일도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사정이 딱해 보여 실비의 선임료로 수임을 하여 여러 과정 끝에 상대방에게 소장이 송달되게 하였다. 그런데 어느 일요일 오후, 갑자기 휴대폰이 울리더니 그 의뢰인이 다급한 목소리로, “변호사님, 왜 제 주소를 가르쳐 주셨어요? 애아빠가 찾아와 문을 두드리고 있어요.”라고 화를 냈다.

때로는 자신을 숨기고 소송을 하고 싶기도 하겠지만 아직 그런 제도는 없기 때문에 청구인 주소가 표시될 수밖에 없고 이제 법원이 개입하는 상태이므로 큰 문제는 없을 거다. 문 열어주지 마시고 전화로 이야기하자고 하고 무슨 위험이 감지되면 바로 112에 신고하라는 일반적인 조언을 하였다. 그리고 그날 밤 일이 어떻게 되었나 다소의 궁금증을 갖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다음날 오전, 그 의뢰인은 행복한 목소리로 전화해 양육비를 주기로 했으니 소를 취하해 달라고 했다. 사연인 즉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고 아들을 외면한 전남편에게 미움만 가득했는데 그날 양육비청구를 계기로 찾아온 그와 한 시간 넘게 통화하면서 그동안 고생 많이 했으며 어렵게 살다가 이제야 재혼하고 안정을 찾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양육비 못줘서 미안하다, 그렇지만 이제 형편이 나아지고 있으니 앞으로 조금씩 주겠다고 사과했단다. 소식 없는 상대방에게 소장을 날려 소식을 알게 되고 기꺼이 이해해 줄 마음이 생겼으니, 싸움을 걸어 평화를 얻은 셈이다.

다음 주에는 제주도에 가서 조정에 참석해야 한다. 최악의 상황에서 폭력을 피해 피신하고 별거한 지 30여년이 되었건만 남편은 이혼을 못해주겠다 한다. 딸이 장성해 결혼까지 했고, 평생 미지급한 양육비 면제까지 해주겠다는데 도대체 무슨 심사인가. 그동안 별거상태였으니 현상적 평화는 유지된 셈이지만, 이제 공식적으로 분쟁을 종식하고 평화를 찾기 위해 서류정리를 원하는 터이니 가서 잘 설득해봐야겠다.

때로는 인내와 양보로 평화를 찾을 수도 있지만, 때로는 보다 적극적인 방법을 취해 평화를 끌어올 수도 있다. 지금이 어떻게 해야 할 때인지, 어느 것이 내게 맞는 것인지, 어떻게 해야 평생 후회가 없을지는 자신과의 깊은 대화를 통해 스스로 알아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