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과 문학
2014년 06월 02일(월) 00:00 가가
이 탄 희
광주지방법원 판사
광주지방법원 판사
올해 초 어느 법원에서 ‘국민과의 소통’을 주제로 한 대규모 행사가 있었습니다. 당시 초대되었던 존경받는 변호사 한 분이 ‘대한민국 국민에게 판사가 무슨 고민을 했는지 도대체 전달이 되지 않는다’, ‘전달이 되지 않으니 판사를 이해할 수도 존경할 수도 없다’, ‘국민에게 다가갈 수 있는, 수필과 같은 판결문이 필요하다’라고 이야기하여 화제가 되었습니다. 위 이야기는 ‘국민에게 쉽게 다가오는 판결’의 예로서, 미국연방대법원의 판결문 몇 건을 소개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그렇다면 미국 법원의 판결문들에는 정말로 우리와 다른 무슨 특색이 있는 것일까요? 실제로 많은 미국 판사들은 사건에 대한 자신들의 통찰과 고민을 국민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판결문에 표현해온 것이 사법부의 권위를 유지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들은 지금도 판결문을 핵심 위주로 짧게 쓰려 노력하고, 때로는 국민이 친숙한 문학작품을 원용하기도 합니다. 문학작품을 원용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대중적 친숙함을 도모하기 위함이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고민의 보편성을 보여주기 위함이지요.
예를 들어 벌써 21년 전인 1993년을 기준으로 미국 법원의 판결문에 셰익스피어의 작품 원문을 그대로 인용한 경우만 800건이 넘습니다. 연방대법원 판결문만 보더라도,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의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막대한 벌금을 부과하겠어, 후회막급이 되도록’이라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원문을 원용하고, 언론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명예란 영혼에 버금가는 보배 (중략) 저한테서 명예를 뺏으면 뺏은 놈은 그것을 쓰지도 못하면서 나만 빈털터리가 되지요’라는 ‘오델로’의 원문을 원용하고, 내심의 의사만을 이유로 형사처벌하는 위험성을 지적하면서 ‘생각이란 실체가 없는 것, 하려다 그만둔 건 한갓 생각에 불과하지요’라는 ‘눈에는 눈’의 원문을 원용하는 식입니다. 이런 판결문에 처음엔 갸우뚱하던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문학인들의 평론과 법조인들의 분석이 씨실과 날실이 되어 점점 국민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결국 보다 많은 사람들이 원문의 맥락과 판사의 고민을 음미해 보게 됩니다. 여기서 지적 위안을 받은 미국인들은 워싱턴의 케네디센터, LA의 헐리우드 등에서 자발적인 모의재판을 개최하고, 현직 연방대법관을 재판장으로 초대하기도 합니다. 모의재판은 나중에 연례행사로 발전되고, 멜 깁슨, 조디 포스터, 헬렌 헌트 등과 같은 유명인사들도 배심원과 방청객으로 참여하며, 청소년들은 이런 경험을 거쳐 법조인의 꿈을 키우기도 합니다.
사실 판결문에 문학작품을 적절하게 원용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일단 당해 사건에서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배경과 본질을 깊이 분석해야 하고, 그렇게 다다른 문제의 본질 속에서 인간의 보편성을 발견해야 하며, 그 보편성을 잘 담아낸 문학작품을 골라내야 합니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추어야 가능한 일이고, 그와 동시에 매우 많은 시간과 사색을 요하는 일이지요.
개인적으로 친부가 자녀에게 지속적인 가혹행위를 한 사건에서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중 ‘자녀에 대하여’를 원용하려한 적이 한차례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유사한 시도조차 해보지 못하였습니다. 다른 동료 판사들도 대체로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이혼으로 인한 위자료 사건, 가출로 빚어진 소년사건, 피해자를 위로해야 할 형사사건 등에서 한두차례 열심히 시도해보다가는, 이내 포기하곤 합니다.
우리나라 판사에게는 왜 이러한 시도가 쉽지 않을까요? 정답은 바로 사건 수에 있습니다. 미국연방대법원은 2012년 한 해 동안 본안판단을 한 사건 수가 79건입니다. 비교를 위해 편의적으로 9명의 대법관으로 나누자면 1명당 1달에 1건이 채 되지 않지요. 우리나라 대법원은 같은 기간 동안 본안판단을 한 민사사건의 수만 5786건입니다. 1명당 1달에 37건이 넘습니다. 형사사건의 수를 합하면 훨씬 많지요. 하급심 판사의 사건 수 차이는 더 큽니다. 광주지방법원만 하더라도 2013년 한 해 동안 1심 형사단독판사 1명이 1달에 평균 100건 이상을 처리했으니까요. 재판진행 등 여러 가지 현실적인 여건들을 고려하면, 주어진 날에는 하루 평균 10건 이상의 판결문을 작성해야 한다는 결론이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판결문에 판사의 통찰과 고민을 담고자 사색하며 시간을 지체하다가, 그리고 이를 국민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하고자 탐색하는 호기를 부리다가, 사건의 적체를 빚어 많은 사람들을 자기 차례에 대한 기약 없는 기다림으로 몰아넣게 될까봐 두려운 것이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오늘도 꿈꿉니다. 사건에 대한 저의 통찰과 고민을 판결문에 한건씩 온전하게 담아낼 수 있게 되는 그날을. 대한민국 국민이 판사의 고민을 함께 음미하며 지적 위안을 받게 되는 그날을.
개인적으로 친부가 자녀에게 지속적인 가혹행위를 한 사건에서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중 ‘자녀에 대하여’를 원용하려한 적이 한차례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유사한 시도조차 해보지 못하였습니다. 다른 동료 판사들도 대체로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이혼으로 인한 위자료 사건, 가출로 빚어진 소년사건, 피해자를 위로해야 할 형사사건 등에서 한두차례 열심히 시도해보다가는, 이내 포기하곤 합니다.
우리나라 판사에게는 왜 이러한 시도가 쉽지 않을까요? 정답은 바로 사건 수에 있습니다. 미국연방대법원은 2012년 한 해 동안 본안판단을 한 사건 수가 79건입니다. 비교를 위해 편의적으로 9명의 대법관으로 나누자면 1명당 1달에 1건이 채 되지 않지요. 우리나라 대법원은 같은 기간 동안 본안판단을 한 민사사건의 수만 5786건입니다. 1명당 1달에 37건이 넘습니다. 형사사건의 수를 합하면 훨씬 많지요. 하급심 판사의 사건 수 차이는 더 큽니다. 광주지방법원만 하더라도 2013년 한 해 동안 1심 형사단독판사 1명이 1달에 평균 100건 이상을 처리했으니까요. 재판진행 등 여러 가지 현실적인 여건들을 고려하면, 주어진 날에는 하루 평균 10건 이상의 판결문을 작성해야 한다는 결론이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판결문에 판사의 통찰과 고민을 담고자 사색하며 시간을 지체하다가, 그리고 이를 국민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표현하고자 탐색하는 호기를 부리다가, 사건의 적체를 빚어 많은 사람들을 자기 차례에 대한 기약 없는 기다림으로 몰아넣게 될까봐 두려운 것이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오늘도 꿈꿉니다. 사건에 대한 저의 통찰과 고민을 판결문에 한건씩 온전하게 담아낼 수 있게 되는 그날을. 대한민국 국민이 판사의 고민을 함께 음미하며 지적 위안을 받게 되는 그날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