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아닌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면 당황하거나 화가 나기도 합니다. 수년 전 어느 여행지에서 영국인 가족과 함께 포켓볼을 치며 어울리게 되었습니다. 공통 화제를 찾기 위해 계속 “지성 박, 멘체스터, 풋볼!!”을 외쳐댔지만, 안타깝게도 축구보다 럭비를 좋아하는 영국인 가족은 박지성을 잘 몰랐고, 저는 럭비에 대해서 무지했습니다. 분위기가 서먹해진 것도 잠시, 짧은 지식으로 유럽 관광지나 유명 영국 배우 이야기를 하며 자연스럽게 개인적인 이야기도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군법무관인데 전역 후에 판사가 될 계획이라고 소개를 했지요. 그런데 영국인 남편이 웃으며 한마디를 하더군요. “You are too young to be a judge."

너무 어려서 판사가 될 수 없다? 판사가 되기에는 너무 어리다? 순간 당황스럽기도 했고, 거짓말쟁이로 의심받는 것 같아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한참이나 한국과 영국의 사법제도의 차이에 관해 열변을 토했지요. 당연히 우리의 대화는 지루하고 재미없는 것이 되었고, 그즈음 영국인 가족과는 이별을 했습니다.

그제야 어느 영화에선가 가발을 쓰고 근엄하게 법대에 앉아 있는 노년의 판사를 본 기억이 났습니다. 영국인 부부에게는 서른도 되지 않았던 동양의 남자가 판사가 된다는 것이 의아하게 여겨질 만도 했겠지요. 사법시험을 합격하고 연수원을 마치면 바로 판사가 된다는 것은 영국에서는 통하지 않는 우리만의 상식이었던 것입니다.

법학전문대학원, 소위 로스쿨이 올해로 6년째가 되었습니다. 로스쿨의 시작과 함께 판사의 임용방식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사법연수원 수료자 중에서 선발하던 것을, 일정기간 검사나 변호사로서 경력이 있는 사람들 중에서 임용하는 것입니다. 당장 내년이면 경력 3년차가 되는 로스쿨 1기 출신 변호사들이 판사로 선발될 예정입니다. 점차적으로 10년 이상의 경력이 필요하고요. 법조일원화가 전면적으로 시행되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대부분의 판사는 40대 이상으로 과거에 비해서 고령화될 것입니다.

법조 경력의 대부분을 법대에서 보내온 우리나라 판사들은 법관으로서의 오랜 경험만큼이나 그 업무능력과 숙련도에서 탁월하다고 평가를 받는 것 같습니다. 국민들은 별로 공감을 하지 못해서 안타깝지만, 살인적인 업무량에도 공정하고 신속하게 사건을 처리하고 있어서 국제기구에서는 우리나라 사법제도를 세계 2위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제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면이 없지 않아 보입니다.

그래서 법조일원화에 따른 판사의 고령화는 반가운 면이 있습니다. 당사자는 나이가 상당히 많은데 주심판사는 30대 초반, 심지어 20대인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패소 판결을 받은 당사자의 불평거리 중 하나는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판사가 뭘 알겠냐는 것이겠지요. 70대 부부의 황혼 이혼 사건을 30대 초반의 미혼 판사가 담당했을 때에는 더할 것이고요. 저 역시 재판을 하면서 사회 경험이 부족해서 세상물정 모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닌가하고 고민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물론 무조건 자기에게 불리한 판결이 나오면 판사를 비난하는 분위기도 문제지만, 법정에서 당사자를 설득하고 이해시키려는 노력이 부족한 것은 저 역시 책임을 피해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재판은 공정할 뿐만 아니라 공정하게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당사자와 국민의 납득과 이해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이와 경력만으로 공정하고 바른 재판이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나이만큼 인격이 성숙해야 하고, 경력만큼 전문성이 있고 세상물정에도 밝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판사를 임용할 수 있는 노력을 국민과 함께 했으면 합니다. 사법권의 주인은 국민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