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섬에서 태어났다. 청해. 이름처럼 푸른 바다의 섬 완도.

아버지가 섬마을 선생님이어서 여러 섬을 돌아다니면서 유년기를 보냈다. 뜨거운 태양과 거친 바다, 자연의 민얼굴을 보고 자라난 어린 시절의 경험이 그림을 그리는데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그중 색감과 질감으로 강렬하게 다가오는 기억이 하나 있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즈음 어머니는 친정 나들이를 하셨다. 저녁부터 부산하게 친정집 선물을 준비하고 이른 아침 집을 나섰다. 항해는 길었다. 어린 꼬마의 시간으론 얼마나 걸렸는지 모른다. 완도항에서 출발해 잿빛 겨울 바다 위 여러 섬을 거쳤다. 자고 일어나도 바다 위, 또 자고 일어나도 바다 위였다. 이윽고 해질 무렵 도착한 약산 천동리 포구. 그곳에서 섬 반대쪽 외가까지는 또 얼마나 걸어야 할지 몰랐다. 두 사람이 겨우 마주쳐 지나갈 만한 바닷가 오솔길을 걷고 걸어 외가로 갔다.

어머니는 막내 여동생을 업고 양쪽에 나와 동생을 끼고 머리엔 친정선물 한 보따리 짐을 이셨다. 어머니는 그 무거운 짐과 칭얼거리는 새끼들을 데리고도 묵묵히 길을 걸었다. 밤하늘에 달빛이 고요히 비추고 낭떠러지 위로 오솔길은 높고 낮게 아스라이 계속되었다. 달이 서산에 걸리고 길가에서 ‘노숙이라도 해야 하나’는 생각이 들때에 멀리 불 켜진 외딴집이 보였다. 어머니와 우리는 고구마를 보관하는 쪽방에서 비좁은 하룻밤을 보내고 이른 아침 다시 길을 떠났다. 해가 중천에 올 무렵, 멀리 마을 초입에 외할머니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70년대 초·중반 우리네 산들은 아직 민둥산이었다.

초봄의 날씨, 떨어진 갈퀴나무 하나 없는 어두운 갈색빛의 민둥산과 어린 소나무, 그 사이 간간이 피어있는 분홍 진달래. 피부 속으로 파고드는 겨울바람과 황혼의 노을, 깊은 파도가 포효하는 바닷가에 나는 서 있었다. 아홉 살짜리 꼬마의 눈에 비친 풍경이 사십 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히 각인되어 있다. 이 이미지는 어린 몸의 체험과 자연의 매서운 위력으로 체화돼 있어 언젠가는 그림으로 풀어내야 할 숙제처럼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섬사람은 부지런해야 했다.

한때 개가 돈을 물고 다닌다는 이야기가 됐지만, 손발이 시린 겨울 바다에서 김발과 미역 작업하는 것을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일 것이다. 먹을 것이 부족한 섬마을에서는 일년 사계절 부지런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했다. 바다에 나가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과 그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남은 사람들이 강인한 생명력의 섬 문화를 만들었다. 그리고 이상향의 꿈을 꾸었다.

이청준의 중편소설 ‘이어도’는 이렇게 시작된다.

‘긴긴 세월 동안 섬은 늘 거기 있어 왔다. 그러나 섬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섬을 본 사람은 모두가 섬으로 가버렸기 때문이다. 아무도 다시 섬을 떠나 돌아온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피안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현실 삶의 불확실성이 교차하는 ‘이어도’ 전설은, 당집이나 용왕제 등으로 실체화된 섬사람들의 자연에 대한 숙명적이고 순응적인 세계관을 잘 말해주고 있다.

숙명처럼 떠나야 하는 섬 아이들의 기억도 있다.

나는 완도항만터미널 근처에 살았었다. 매년 여름이면 그곳은 신지 명사십리에 가는 철부선으로 부산했다. 요즘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태평양 오지 섬 아이들처럼 우리는 까까머리에 등 허물이 몇 번씩 벗겨질 정도로 시커멓게 타면서 물놀이를 즐겼다. 바닷물 속에서 머리만 동동 떠 있는 모습이 가관이었을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명사십리 철부선의 뽀얀 피부, 화사한 옷차림의 또래 도시아이들을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린 마음에도 고향의 누추함을 알았을까?

우리는 언젠가는 고향을 떠날 것을 알고 있었다. 동네 선배들이 외항선과 원양어선을 타고 전 세계를 항해하다 귀향할 때 가져온 이국의 풍속과 물건들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밖의 세계에 대한 꿈을 꾸었다. 그리고 가끔 라스팔마스 같은 이름도 낯선 타향에 묻힌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다. 우리는 대부분 상급학교 진학과 결혼, 직장생활로 인해 자연스럽게 타향으로 떠났다.

부모님들만 남았다.

우리를 키워준 섬은 늙어가고 기억은 옅어진다.

이제 관광이나 청정한 먹을거리를 찾는 도시 사람들에게 여가의 대상으로 섬의 가치가 새롭게 인식되고 있다. 다리가 연결되면서 육지화되는 섬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섬에 관광객 위주의 편의를 위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섬의 ‘섬다움’을 해치는 개발이 다반사다. 며칠을 즐기는 관광객은 많아지고 있으나 늙어가는 부모님들만 남은 섬에는 섬의 생태와 문화를 지키는 일들이 어려워져만 간다.

고향을 지켰던 사람들, 다시 고향에 깃든 사람들과 밖에서 그리워하는 사람들. 그 안에 섬이 있다. 지워질 수 없는 자신만의 섬.

고향이 타향이 되어버린 지금, 여름 한 날 추억을 찾아 섬으로 떠난다. 무작정 출발했던 길은 가는 도중 몇 번의 경로를 재지정하며 결국 외갓집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20여 년 만이다. 연륙교를 통해 가는 길은 몇 시간 안에 광주에서 외갓집이 있는 마을로 인도했다. 오는 길에서는 추억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계절이 다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마을은 많이 변하지 않았지만, 이상한 생경함에 마음이 편하질 않았다. 마을 골목길을 두서없이 헤매다 그동안 주인이 변해버린 옛집과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추억을 두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길을 돌렸다.

슬픔은 마음을 정화한다든가. 동요 ‘섬 집 아이’를 들으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정화(淨化)의 눈물이 난다. 기억 속의 고향에 서있는 나는 슬프다.



* 조정태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개인전 5회 및 단체전 다수

-2004∼2013년 5·18민중항쟁 특별전 기획(5·18기념관 및 옛 전남 도청일원)

-전 광주민미협 회장, 현 광주민예총회원, 광주민미협 회원, 광주시립미술관 전시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