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마을에 가면 편안해진다. 세상의 근심걱정, 번다한 생각들은 눈 녹듯 사라진다. 고흥 거금도 신평(新平)마을. 이름처럼 평화롭고 아늑한 어촌이다. 필경 세상의 모든 만물은 그 이름대로 지음을 받고, 그 이름대로 운명이 결정된다 하지 않던가. 신평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 한미한 어촌이 발하는 아우라는 이곳을 찾는 이의 마음을 부드럽게 다독여 준다.

늦여름과 초가을의 경계를 지나는 이즈음, 신평의 청색 바다는 눈부시게 아름답다. 그저 그런 수사가 아니다. 한눈에 들어오는 짙푸른 바다는 푸른 천을 펼쳐놓은 형상이다. 특유의 배산임해(背山臨海) 지형 때문일 터. 올망졸망한 산세는 망망한 바다를 품에 안아 고흥반도를 향해 수굿하게 뻗쳐 있다.

무엇보다 신평은 유서 깊은 어촌이다. 고흥반도 남단의 고봉명산인 적대봉의 북방산 아래 위치한다. 왼쪽으로는 천둥산, 오른쪽으로는 천관산이 자리하며 인근에 월포마을과 동정마을이 이웃한다. 바다 너머로는 녹동항이 지척이고 사슴 지형의 소록도(小鹿島)도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역사적인 관점에서 신평 마을의 가치 또한 남다르다. 마을 중앙에 자리한, 일제 강점기 지어진 어업조합 건물이 이를 방증한다. 시간의 풍화가 빚은 퇴락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건물은 한때 영화(榮華)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말없이 웅변한다.

마을 이장을 맡고 있는 진평화(72)씨는 “1918년 목가상이라는 이름을 가진 일본 사람이 말뚝을 박아 재래식 해태(김)를 재배하기 시작했다”며 “이후 1922년에 금산해태조합이 설립됐으며 이후 전국적인 어촌조합으로 승격됐다”고 말했다.

이곳 어업조합 건물은 해태조합이 설립되던 1922년 건립됐다. 붉은 벽돌의 슬레이트 지붕은 전형적인 일본식 구조로, 지금은 흰색 페인트가 덧칠해져 붉은색이 희미하다. 전체적인 모형과 이미지는 그대로인데 당시 붉은 벽돌은 소록도병원 벽돌공장에서 찍어내던 것이란다. 푸른 바다를 가로질러 역사의 침윤(浸潤)은 이렇듯 명징하게 실재하는가 보다.

당시에는 호롱불을 밝혀가며 김을 생산할 만큼 해태 양식과 가공이 번성했다. 어업조합 건물 인근에 김 가공공장의 흔적이 남아 있다. 진 이장은 “당시 레슬링 김 일 선수의 건의로 전기시설이 도입됐는데, 고흥군 섬 지역에서는 최초로 전깃불이 들어왔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흥망성쇠의 시류를 이곳 또한 피해갈 수는 없었다. 1970년대 어업조합이 고흥군 수산업 협동조합으로 합병되면서 마을은 점차 공동화 위기에 직면한다. 개발위원장을 맡고 있는 권기풍(80)씨는 “신평 김이라고 하면 묻지도 않고 사가던 시절이 있었다. 오죽하면 동네 개들도 5000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뼈대만 남은 어촌건물을 둘러보며 주민들의 말이 허언이 아님을 실감한다. 건물 주위로 160년이 넘은 향나무가 이곳의 역사와 가치를 보증한다. 향나무는 현자처럼 마을을 굽어보며 특유의 향기를 내뿜는다. 다행히 이곳 출신 배평암 씨라는 분이 건물의 역사성과 오래된 향나무의 가치를 알아봤던 모양이다. 지인에게 매입 의향을 타진해, 2011년 5월 수협으로부터 건물을 사들였다.

수십 년 전만 해도 김은 고흥이 주산지였다. 그 중심에 신평이 있었고, 어촌조합 건물이 전초기지였다. 이곳은 김 양식의 역사를 담고 있다는 면에서 전남 수산 100년의 보고(寶庫)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민들은 어촌조합 건물이 전남도 문화자산으로 등록됐으면 하는 눈치다. 또한 김양식, 수산업과 관련된 다양한 콘텐츠를 전시하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기를 원한다. 머잖은 장래에 신평은 근대투어 명소로 부상할 것 같다. 지금 신평은 평화로운 이미지에서 깨어나, 미래를 향해 새롭게 도약하고 있다.



/박성천기자 sky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