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판사님이 자신이 재판 중인 민사사건을 이야기하면서 흘린 문구다. “사실은 힘이 있잖아.” 귀에 꽂힌다. 사실의 힘이라니….

처음 들어본 표현인 것 같지만 사실 이미 판결문에 여러 차례 썼던 말이다. ‘∼는 것은 통상의 거래관념 내지 경험칙에 반한다.’ 사실을 주장하지 않은 당신 말은 (힘이 없어서) 그대로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그때 이후로 ‘사실의 힘’이 말을 그대로 내 마음에 새겼다. 이건 변론주의, 입증책임의 원칙과 더불어 내 민사재판의 무기이다. 마음도 편해진다. 사실을 말하는 자 승소하리라.

사실의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 사실은 보편적이기 때문에 설득력과 신빙성을 획득한다.

어느 원고였던 이가 발끈한다. “난 법정에서 사실만 말했는데도 졌다”고요. 그럴 수 있다.

판사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고, 남의 일에 함부로 개입할 권한도 없다. 당사자가 주장하는 사실과 당사자가 제출하는 증거에 근거하여 주장의 당부를 따질 뿐이다. 만일 원고가 사실을 말하였어도 필요한 사실을 누락했거나 증거를 갖출 수 없는 것이었다면 그나마 덜 억울할 일이다.

사실이 주관적이라는 데에 더 큰 함정이 있다. 흔히들 말하지 않는가, 사실은 진실과 다르다고. 그럼에도 때때로 원고와 피고 모두 스스로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믿는다(믿어버린다).

그런데 민사재판에서의 사실은 제3자인 판사가 법정 또는 사무실에서 변론과 증거조사 결과에 따라 사후에 재정립하는 사실이다.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던 판사가 재정립한다는 점에서 불완전하지만, 사실이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객관적 위치에 있는 제3자가 사실을 재정립한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민사소송은 사실을 말하는 당사자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우선 정직한 사람은 마음이 편하다. 누군가를, 그것도 재판장을 현혹시킨다는 것은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한 가지 거짓말을 하려거든 열 가지 거짓말을 준비해야 한다. 재판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거짓 문서를 만들고, 거짓 증언을 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거짓 주장으로 일관하고 이를 뒷받침한다는 것은 많은 주장이 오고갈수록 힘들어진다. 그래서 판단이 잘 서지 않을 때에는 재판을 계속한다.

때때로 사실은 그리 쉽게 발견되거나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대체로 어느 한 편에 더 가까운 채 양쪽 그 사이 어디메쯤 있기도 하다. 그러나 주장의 당부를 가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모든 과거 사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파악될 필요는 없기 때문에 끝내 판결은 나온다.

재판을 앞둔 당사자에게 정직하게 재판에 임하라고는 못하겠다.(성실하게는 임해야 한다) 소송도 전략이 필요한 만큼 막연히 사실과 정직을 내세워 이겨보겠다는 생각은 순진하다. 게다가 민사재판은 진실한 사실을 가리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에 대한 해석과 법적 판단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재판에서 사실을 말하고 있다면, 내가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인식하고 기억하는 사실에 불과하다는 겸손한 마음으로 재판의 결과를 기다려주면 고맙겠다. 아래 조문이 내 마음을 진정시키듯 당신의 마음을 진정시킬 수는 없겠지만 이 자리를 빌어 한번쯤 나누고 싶다.

민사소송법 제202조(자유심증주의) 법원은 변론 전체의 취지와 증거조사의 결과를 참작하여 자유로운 심증으로 사회정의와 형평의 이념에 입각하여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따라 사실주장이 진실한지 아닌지를 판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