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님, 제가 얼마나 힘든지 모르시죠. 저도 피해자인 것 같은데 피해자라고 말도 못하고….” 전화 금융 사기, 일명 보이스피싱 사건에서 피해금을 인출한 혐의로 입건된 피의자가 오히려 자신도 피해자라며 나에게 억울함을 호소한다.

피해자가 말하는 사건의 경위는 이렇다. 인터넷 구직사이트에 구인광고를 올린 업체에 연락했더니 자신들은 홍콩에 있는 명품 판매업체인데 광주에 지점을 낼 계획이라 미리 직원 채용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고, 채용되었으니 앞으로 급여를 받을 계좌번호를 알려달라고 했단다. 그리고는 광주점이 개점하기 전 미리 광주에서 명품 구매를 원하는 고객이 있으면 그 예약금을 피의자의 계좌로 받을 것이니 그 돈을 인출해 본사 직원에게 건네 달라고 하기에 그 지시에 따라 자신의 계좌로 입금된 돈을 인출해 본사 직원이라는 사람에게 주었다고 한다.

통장을 양도양수하거나 대가를 받기로 하고 대여하는 행위는 전자금융거래법 위반죄에 해당하여 처벌을 받게 된다. 통장, 현금카드, 보안카드와 같은 실물이 오고 갈 경우 전자금융거래법 위반죄로 처벌이 되고 그 처벌 수준도 점차 강화되어 대포통장을 마련하기 어렵게 되자 보이스피싱 조직원들이 이제는 자신들이 대포통장을 수령하는 것이 아니라 계좌번호 정도만 파악한 후 명의자들로 하여금 직접 인출책 역할을 하도록 유도하는 수법까지 등장한 것이다.

문제는 통장을 보내주지 않고 계좌번호를 알려주었을 뿐인 이 피의자의 경우도 보이스피싱 가담자로 사기죄나 사기방조죄로 처벌을 받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범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확정적인 고의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 행위로 어떤 범죄 결과가 발생할 가능성을 인식했음에도 그 결과 발생을 인용하고 행위로 나아간 경우, 이른바 ‘미필적 고의’가 인정되는 경우에도 범죄가 성립한다.

이 같은 사례의 경우라면 피의자가 그 업체가 실존하는 회사인지 제대로 확인해 본 적이 없고, 아직 출근도 하지 않은 예비 직원의 계좌로 고액의 회사자금을 송금하는 것은 이례적이며, 돈을 송금받아 인출한 횟수가 많고, 그 금액이 고액이며, 인출한 돈을 비밀리에 본사 직원에게 건네주도록 지시를 받거나 그 돈이 범죄와 관련된 것임을 짐작할만한 말을 들었다는 등의 사실이 인정될 경우, 피의자의 계좌에 입금될 돈이 범죄의 수익금이라는 점을 예상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고, 그럼에도 인출행위를 한 것은 미필적 고의가 있었다고 인정되어 사기죄 또는 사기방조죄로 처벌될 가능성이 있다.

보이스피싱은 다수의 피해자를 양산하는 중대한 범죄이므로 단순한 가담자라고 할지라도 엄하게 처벌해야 할 필요성이 크다. ‘생활이 어려워 구직이나 대출을 알아보다 자신도 모르게 인출책이 되어버렸다’며 선처를 바라는 피의자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만 보이스피싱 사건의 피해자들이 입은 피해를 생각하면 ‘몰랐어요’라는 피의자들의 변명을 그대로 믿고 마냥 선처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가 양도·대여한 통장으로, 내가 함부로 제공한 금융정보로 인해 누군가에게 큰 피해를 끼칠 수 있고, 통장을 직접 넘겨주지 않더라도 계좌번호 등 금융거래 정보를 알려주는 것만으로도 보이스피싱 범죄에 연루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주의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