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이 다 좋다고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봄이 오는 듯 지나고 여름이 올동말동하는 신록이 우거질 때가 참 좋다. 연한 나뭇잎들이 햇빛에 반짝이는 모습을 보면 어린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이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막연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대가 가슴을 부풀게 한다. 겨우내 황량했던 나뭇가지를 떠올리면 경외심이 들기도 한다. 맨살로 추위에 떨어야 했던 고통의 시간을 견뎌냈기에 이토록 아름다우리.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런데 사람 사는 이치와 자연의 이치가 매한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살이에는 크고 작은 분쟁이 따르기 마련이다. 뜻하지 않은 분쟁으로 심신이 피곤한데, 설상가상으로 경제적 어려움까지 겹쳐질 때가 많다. 사정이 이 지경에 이르면 남을 배려할 여유가 없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살펴보고,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마저 쉽지 않다.

겨울이 닥친 것이다. 추위만도 버거운데 배까지 고프다. 티끌만한 손해가 태산같이 커 보이고, 한 푼의 이익을 위하여 아귀다툼을 벌이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보통 재판은 이때 시작되기 마련이다. 결국 재판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국가의 힘을 빌려 자신의 이익을 쟁취하려는 것이다. 종종 거짓을 고하여 부당하게 이익을 얻거나 의무를 면하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방법으로는 분쟁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늘의 법망은 크고 넓어 엉성해 보이지만 놓치지 않는다고 했던가? 설령 거짓 고함으로 판사를 속였다고 하더라도, 곧 새로운 분쟁이 시작되어 고난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겨울을 나고 신록을 키워내듯이, 상생하기 위해서는 고난의 시기를 잘 보내야 한다. 피하고 싶다고 하여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판사의 고민은 여기서 시작된다. 어떻게 하면 재판을 잘해 힘겨워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루빨리 분쟁에서 벗어나 생업에 종사하게 할 수 있을까? 당사자들의 주장을 곰곰이 되새기고, 사건기록을 몇 번이고 읽으면서 방법을 찾는다.

우선 화해를 권한다. 화해를 통한 상생이 가장 좋기 때문이다. 그러나 겨울나기가 그리 쉽나? 쉽게 화해할 것 같았으면, 법원을 찾았겠나? 더불어 사는 세상이니, 지금의 손해가 미래의 복이니,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니, 온갖 설득에도 요지부동이다. 필자는 이럴 때 나뭇가지가 맨살을 드러낸 채 북풍한설을 견디고 마침내 신록을 키워내는 자연의 섭리를 생각한다. 겨울이 없으면 봄도 없듯이 아픔 없이는 화해도 없는 법이다. 지금 처지가 빈한하다는 이유만으로 잘못을 그냥 덮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처지가 낫다는 이유만으로 상처받은 마음이 곧 치유되는 것도 아니다.

판사도 불완전한 존재인지라 모든 진실을 한 치 어그러짐 없이 알아낼 수는 없지만, 힘을 다하여 큰 틀에서 공감할 수 있는 수준까지 사실관계를 밝혀낸다. 그 후 잘잘못을 판단해 권리가 있는 사람에게는 조금 양보하는 미덕을, 잘못이 있는 사람에게는 우선 그 책임을 인정하고 상대방의 양해를 구하도록 권유한다. 잘잘못이 잘 가려지고 적절한 중재안이 만들어지면, 사람은 지혜롭고 합리적인지라 줄곧 화해하고 법정을 나선다. 겨울을 잘 견뎌내고 싹을 틔운 것이다. 이러할 때 나의 마음은 햇살에 반짝이는 신록을 볼 때처럼 달뜬다.

그런데 늦은 밤까지 일해도 줄지 않는 미제사건 수를 보면, 나라가 겨울에 있는 까닭에 백성들에게 봄이 오지 않은 것 같다.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던가? 서민들의 곳간이 텅 비게끔 국가가 운영된 데에 대한 원인과 책임을 갈무리하는 절차가 매우 힘들 것이나, 그러한 절차를 거쳐야만 화해와 상생이 가능하고, 그것이 자연의 섭리고 법의 정신이다. 우리 사회가 부디 지혜롭게 겨울을 잘 보내어, 캐비닛에 쌓여 있는 미제사건이 줄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나도 마냥 신록을 즐길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