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 전통문화의 보물창고
김형주
2017년 12월 19일(화) 00:00 가가
전라도 들여다보기
보배로운 섬 진도는 도서지역이지만, 비교적 너른 들판이 있어 어업과 더불어 쌀·보리·대파·울금·구기자 등 많은 농산물이 산출되는 고장이기도 하다.
진도의 역사적 변천을 보면, 백제시대에는 인진도군(因珍島郡)이라 하여 산하에 도산현(徒山縣)과 매구리현(買仇里縣)을 거느렸다. 통일신라시기 진도현으로 개칭되어 무안군에 속하면서 도산현은 뇌산군(牢山郡)으로 승격되었고, 매구리현은 첨탐현(瞻耽縣)으로 고쳐져 뇌산군에 예속되었다. 고려초 940년에 뇌산군을 폐지해 이를 가흥현(嘉興縣), 첨탐현은 임회현(臨淮縣), 진도현은 외이현(外耳縣)으로 개칭하고 이들 3현을 속현으로 두는 진도군을 독립시켰다.
조선초기 1406년 해남현과 통합해 해진군(海珍郡)이 되었다가 1437년에 해남과 분리, 독립하였다. 1662년에는 향교에 모셔진 궁궐의 위패(殿牌) 분실사건으로 진도현으로 강등된 후 1671년에 다시 군으로 복구되었다. 1865년에는 군사적 요충지를 감안해 도호부로 승격되었으나, 대원군이 실각한 1874년 진도군으로 복귀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흔히 진도는 ‘전통문화의 보고(寶庫)’로 일컬어지는 고장이다. 이처럼 다양하고 풍부한 전통문화가 생성되어 온전하게 보존 계승될 수 있는 요건은 외부세계와 격리된 도서지역이라는 지리적인 특성과 유배지라는 역사적인 요인에 의해 중앙의 고급문화가 지속적으로 유입될 수 있었던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삼국시대에 불교문화, 고려시대에 성리학, 조선후기의 천주교와 과학기술 등 시대별로 외래문화가 유입되어 우리문화의 주류 형성에 기여하였지만, 무속사상에 기반한 우리고유의 토속문화도 강인한 생명력으로 단독 또는 외래문화와 자연스런 결합형태로 연면히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진도지역은 육지에서 떨어진 도서이다 보니, 토속문화가 수백년 동안 주민들의 정신세계와 생활양식으로 고착되면서 온전히 유지되고 독특한 유형을 형성하였다고 하겠다. 무속은 주로 통과의례나 병을 낫게 하는 치병의식에 해당하였는데, 지금은 다시래기(밤달애), 씻김굿 등의 상장례 의식에 집중적으로 잔존하고 있다.
무속의례에는 소리(唱)와 국악장단(반주)이 반드시 따르기 마련이어서 무속의례의 성행은 시나위, 민요, 만가, 북춤 등 소리를 매개로 하는 전통음악이 발전하는 계기를 형성하였다. 특히, 남도인들의 걸죽하면서도 웅숭깊은 정한(情恨)의 미학을 담고있는 진도아리랑은 경쾌하면서 구성지고 활달한 가락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진도는 남화로 불리던 남종산수화의 본향으로 소치(小痴) 허련이 초석을 닦았다. 광해군 때에 진도로 입향한 허대(許垈)의 후손 소치는 공재 윤두서의 화풍을 익힌 후 상경해 추사 김정희에게 본격적인 서화수업을 받았다. 만년 운림산방에 정착한 소치의 화맥은 아들 미산 허형, 손자 남농 허건, 고손자 허진으로 이어진다. 진도홍주도 한양 양반문화의 흔적으로 볼 수 있다.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실장〉
진도의 역사적 변천을 보면, 백제시대에는 인진도군(因珍島郡)이라 하여 산하에 도산현(徒山縣)과 매구리현(買仇里縣)을 거느렸다. 통일신라시기 진도현으로 개칭되어 무안군에 속하면서 도산현은 뇌산군(牢山郡)으로 승격되었고, 매구리현은 첨탐현(瞻耽縣)으로 고쳐져 뇌산군에 예속되었다. 고려초 940년에 뇌산군을 폐지해 이를 가흥현(嘉興縣), 첨탐현은 임회현(臨淮縣), 진도현은 외이현(外耳縣)으로 개칭하고 이들 3현을 속현으로 두는 진도군을 독립시켰다.
흔히 진도는 ‘전통문화의 보고(寶庫)’로 일컬어지는 고장이다. 이처럼 다양하고 풍부한 전통문화가 생성되어 온전하게 보존 계승될 수 있는 요건은 외부세계와 격리된 도서지역이라는 지리적인 특성과 유배지라는 역사적인 요인에 의해 중앙의 고급문화가 지속적으로 유입될 수 있었던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무속의례에는 소리(唱)와 국악장단(반주)이 반드시 따르기 마련이어서 무속의례의 성행은 시나위, 민요, 만가, 북춤 등 소리를 매개로 하는 전통음악이 발전하는 계기를 형성하였다. 특히, 남도인들의 걸죽하면서도 웅숭깊은 정한(情恨)의 미학을 담고있는 진도아리랑은 경쾌하면서 구성지고 활달한 가락으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진도는 남화로 불리던 남종산수화의 본향으로 소치(小痴) 허련이 초석을 닦았다. 광해군 때에 진도로 입향한 허대(許垈)의 후손 소치는 공재 윤두서의 화풍을 익힌 후 상경해 추사 김정희에게 본격적인 서화수업을 받았다. 만년 운림산방에 정착한 소치의 화맥은 아들 미산 허형, 손자 남농 허건, 고손자 허진으로 이어진다. 진도홍주도 한양 양반문화의 흔적으로 볼 수 있다.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