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1000年 인물열전] <6> 소록도-마리안느·마가렛 ①
2018년 02월 28일(수) 00:00
한센인의 영원한 친구 ‘소록도 할매’

1960년대 초반 오스트리아에서 온 마리안느와 마가렛(오른쪽) 두 간호사는 소록도에서 40여년 동안 한센인들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하며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었다. 청춘을 소록도에 오롯이 바친 이들은 ‘나이가 들어 거동이 불편해 주위사람들에게 불편을 주기 싫어 떠난다’는 편지를 남기고 2005년 조용히 고향으로 돌아갔다. 에델바이스를 들고 밝은 표정을 짓고 있는 마가렛과 마리안느.

“사랑하는 친구, 은인들에게. …고향을 떠나 이곳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오랫동안 살았습니다. 이제는 저희들이 천막을 접어야할 때가 왔습니다. …이 편지를 읽는 당신께 큰 사랑과 신뢰를 받아서 하늘만큼 감사합니다. 부족한 점이 많은 외국인인 우리에게 큰 사랑과 존경을 보내주어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2005년 11월 22일 아침, 마리안느 스퇴거와 마가렛 피사렉은 평소와 다름없이 커다란 주전자에 물을 끓여 분유를 타서 환우들의 컵에 따라 주었다. 그리고 병사(病舍)지대에 있는 소록도 2성당(병사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석했다.

그들이 섬을 떠난 후 환우와 직원들에게 편지가 배달됐다. ‘큰 할매’(마리안느)와 ‘작은 할매’(마가렛)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두 사람은 ‘고령으로 제대로 일할 수가 없고, 자신들이 있는 곳(소록도 병원)에 부담을 주기 싫어’ 조용하게 고향 오스트리아로 돌아가는 선택을 했다. 소식을 전해 들은 환우와 직원들은 그들이 살았던 관사와 일했던 ‘M 치료실’로 달려갔다. 그들이 떠난 날짜는 물론 요일까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한 직원은 ‘그날 멘붕이 왔다’고 표현했다.

마리안느는 1962년부터 43년간, 마가렛은 1966년부터 39년간 소록도에서 간호사로 자원봉사하며 한센인들을 위해 묵묵하게, 헌신적으로 사랑과 봉사, 나눔을 실천했다. 28∼29살에 소록도에 왔던 두 사람은 청춘을 소록도에 모두 바치고 70∼71살 ‘할매’가 돼 고향으로 돌아갔다.

◇일제, 1916년 소록도에 한센병환자 격리 수용=고흥군 도양면 녹동과 마주보고 있는 소록도는 어린 사슴의 모양을 닮은 ‘아기사슴섬’이다. 이처럼 예쁜 이름을 가진 소록도에 한센병 환자를 완전 격리 수용하는 자혜의원이 문을 연 때는 1916년 2월.

조선총독부는 1915년 초 당시 위생사무 촉탁이었던 사토 고죠에게 남부 해안도서 가운데 한센병 환자를 집단으로 수용할 수 있는 적절한 부지를 찾도록 했다. 그는 경비선을 타고 부산에서 목포까지 섬들을 순회하다가 소록도로 결정했다. 소록도의 온난한 기후와 자연조건에 주목하면서, 여기에서 난방비 절감과 풍부한 해산물 수급 등이 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소록도에서는 한센인을 대상으로 단종(斷種)과 낙태(落胎), 강제노역 등 비인간적인 행위가 자행됐다. 해방 이후에도 한동안 한센인들의 인권이 무시됐다. 직원지대 보육소에서 지내던 자녀들과 한센병을 앓는 부모들의 면회는 월 한차례 이뤄졌다. 부모와 자녀는 경계선 도로 양쪽 끝에 일렬로 서서 바라봐야만 했다. 이런 상봉이 얼마나 수심이 깊고, 한탄스러웠던지 면회장소는 ‘수탄장’(愁嘆場)이라고 불렸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오스트리아 마트라이와 폴란드 비엘스코 비아와에서 1934년과 1935년에 각각 태어났다. 두 사람은 1950년 마가렛 아버지의 병원에서 처음 만나 인연을 맺었다. 이어 1952∼1955년에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종합대학 부속 간호학교를 나란히 입학하고, 졸업하게 된다. ‘그리스도 왕 시녀회’에 입회하고 청빈·정결·순명을 서원한 두 사람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위해 자신들의 삶을 헌신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리스도 왕 시녀회’는 수도복을 입지 않고 평상복으로 사회인들 틈에 살며 가난하고 소외된 이를 도와주는 것을 일종의 낙으로 삼는 수녀회다.

마리안느는 간호학교 졸업후 인스부르크 대학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다 1962년 2월, 광주교구장 현 헨리 대주교와 5년 계약으로 동양의 작은 나라 한국의 소록도에 발을 딛게 된다. 마가렛은 앞서 1959년 12월, 경북 왜관 한센인 정착지에서 일했다. 이어 1966년 10월 벨기에 ‘다미안 재단’에서 파견한 의료진의 일원으로 소록도에 오게 되면서 마리안느와 다시 만나게 됐다. 당시 소록도병원에는 의사 3명과 간호사 6명이 4000여명의 환자를 돌볼 정도로 의료인력이 부족했다.

마리안느가 소록도병원에서 처음으로 벌인 일은 영아원을 만든 것이었다. 5세이하 아이들이 한센병 부모들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이들을 ‘아직 감염되지 않은 아이’라 해서 미감아(未感兒)라고 불렀다. 오스트리아 가톨릭 부인회의 후원을 받아 사용하지 않는 간호사 기숙사를 개조해 영아원을 만들었다. 공중 목욕탕과 보육소, ‘사랑의 동물원’, 정신병동, 결핵병동 등이 두 사람의 노력으로 속속 들어섰다. 오스트리아는 한자로 ‘오지리’(墺地利)로 표기한다. 그래서 ‘오지리 카톨릭 부인회’라고도 하는 오스트리아 가톨릭부인회 회원들은 십시일반으로 모금해 1994년까지 소록도 한센병 환우들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했다.

마리안느와 마가렛 그리고 다미안 재단 의료진의 활동은 환우들은 물론 직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센병을 천형(天刑)으로 여기며 부모조차 대면하길 꺼리던 당시 분위기 속에서 이들은 환자들의 상처를 맨손으로 직접 만졌고, 피고름이 몸에 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두 사람은 가식이 아닌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는, 따뜻한 사랑의 봉사활동을 펼쳤다.

◇40여 년 봉사 흔적 남은 ‘M 치료실’=소록도병원 개원 100년을 맞아 펴낸 ‘소록도 100년-한센병 그리고 사람, 백 년의 성찰’(의료편)에서는 이렇게 묘사한다.

“…수녀들이 맨손으로 상처를 살피고,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는 모습은 환자는 물론 의사들에게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매일 치료실에 와서 치료를 받고, 우유를 먹고, 약을 먹으면서 환자와 수녀들 사이에 진정한 대화가 형성되었다. 수녀들은 환자들의 모든 고민, 돈은 물론이고 돼지새끼 구입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도움을 주었다. 특히 임신한 경우에는 수녀들의 도움으로 아무도 모르게 출산까지 도움을 받았다. 여성이 임신을 하게 되면, 낙태하거나 소록도를 떠나야했기 때문에 곤란한 상황에 처한 환자들을 아무도 모르게 도운 것이다.”

마리안느는 2016년 5월 소록도병원 개원 100주년을 맞아 소록도를 다시 찾았다. 완치돼 소록도를 떠난 후 연락을 끊고 살던 이들조차 그의 방문 소식을 듣고 소록도를 찾아와 마리안느에게 큰절을 올렸다고 한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본관 1층 작은 방에서 한센병 환자들을 치료했다. 문에는 두 사람의 이니셜을 따서 ‘M 치료실’이라고 붙였다. 두 사람이 소록도를 떠난 후 병원 측은 본관 뒤편 행복병동 1층에 공간을 재현해 놓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작은 공간에 소파와 탁자, 의자, 캐비닛이 가지런하게 정돈돼 있다. 캐비닛에는 분유와 주전자 등이 들어있고, 왼쪽 장에는 가위 등 의료기구가 구비돼 있다. 벽에는 젊은 시절 두 사람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자료사진들이 붙여져 있다. 헌정곡 ‘소록도 할매천사’(작사 반덕진·작곡 반딧불)가 새겨진 기념패가 눈에 들어온다. 아버지 반덕진 우석대 교수가 노랫말을 쓰고, 2016년 당시 전주 만수초등학교 5학년이던 아들 반딧불 군이 작곡한 노래다. 반군은 유치원때 ‘소록도 큰 할매, 작은 할매’라는 동화책을 읽고 영감을 받아 곡을 쓰게 됐다고 한다.

“세상에서 버려진 외로운 섬 소록도/ 어느 겨울날 금발의 수녀가 왔네/ 살이 썩고 뼈가 녹아 손발 없는 환자/ 맨손으로 보살피며 평생을 함께했네/ 꽃다운 수녀 백발의 할매되고/ 절망의 섬은 희망의 섬이 되었네/ 아 소록도 할매천사 마리안느와 마가렛.”

/글·사진=송기동기자 song@

/고흥=주각중기자 gjju@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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