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구의 中國 인물 이야기 <144> 시선 이백
2018년 08월 07일(화) 00:00 가가
중국 최고의 시인…삶 자체가 서정시
이백(李白, 701-762)의 자는 태백 호는 청련거사다. 두보와 함께 중국 최대의 시인으로 꼽힌다.
출생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다. 그의 집안은 간쑤성 룽시현에 살았고 부친은 서역의 상인으로 활동했다. 쓰촨성 창명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25세 무렵 촉을 떠나 중앙으로 나아갔다. 이때 촉 제일의 명산인 아미산에 관한 시 아미산월가(峨眉山月歌)를 남겼다. 이후 742년 42세때 장안에 들어갈 때까지 그의 흔적을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하남성,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 안휘성, 절강성 등 광범위한 지방을 편력하였다. 호북성 강릉에서 도교 교단 지도자 사마승정을 만났는데 선풍도골(仙風道骨)의 품격이 있다는 찬사를 받았다. 이후 장강을 내려가 강남 문화의 중심지인 금릉과 양주에서 세월을 보냈다. 그동안 30여 만금을 탕진했다. 30세 무렵 호북의 안륙에 나타나 지역 명문인 허씨 가문의 딸과 결혼한다. 허씨 가문은 재상을 지낸 명가인데 그와 혼사를 결정한 것은 의외의 사건이다. 호방한 이백의 풍모에 끌려 사위로 맞이했다는 해석이 있다.
관직을 얻기 위해 활동하면서 시심이 맞는 문우들과의 교류도 활발히 했다. 도사 원구단과 시인 맹호연과 사귄 것도 이 즈음이다. 30대 중반 이후에는 낙양과 태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산동성에 눌러 앉아 수년간 살았다. 시인 두보와 원진 등이 그를 ‘산동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로 산동지방과 적잖은 인연을 맺은 것 같다. 사십 줄에 접어들어 절강의 도사 오균과 인연을 맺었다. 한림원에 들어간 오균의 추천으로 드디어 현종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천보 2년(742) 장안에 입성했다. 한림공봉(翰林供奉)의 관직을 얻었다. 매일 출근할 필요도 없는 한직이었다. 가끔 황제의 부름을 받고 시를 짓는 것이 유일한 직무였다. 청평조(淸平調) 세 수가 이즈음 탄생했다. 황제의 면전에서 실세 환관 고력사의 비위를 건드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결국 ‘산으로 돌아가라’는 명을 받고 장안에서 쫓겨났다. 744년 44세때의 일이다.
이후 안녹산의 난이 일어난 755년까지 방랑의 세월을 보냈다. 744년 초여름 낙양에서 두보를 만났다. 둘은 함께 술잔을 주고받으며 문학을 논했다. 만취해서 한 이불을 덮고 자기도 했다. 문인 문일다는 둘의 만남에 대해 “우리 4천년 역사상 이처럼 중대하고 이처럼 신성하고 이처럼 기념해야 할 만남은 일찍이 없었다. 그것은 창공에서 태양과 달이 만난 것과도 같이 기이하고도 상서로운 징조였다”고 설명했다. 섬서성 석문(石門)에서의 이별에 즈음해 이백은 “언제가 될까 이 석문길에서, 다시 우리가 술단지 뚜껑을 열 날이”라는 이별시를 헌정했다.
755년 안녹산이 서진해 낙양을 돌파하고 장안에 입성함으로써 당 왕조는 최대의 위기에 빠졌다. 현종은 사천으로 피난가고 황태자 이형은 감숙성 영무에서 숙종으로 즉위한다. 현종은 16번째 아들 영왕 이린을 강릉 대도독에 임명해 강남 사수를 명하였다. 숙종은 이런 움직임에 위기감이 들었다. 이백은 영왕의 참모가 되었다. 영왕은 숙종의 군대에 패해 붙잡혀 죽임을 당하고 이백도 심양의 감옥에 투옥되었다. 처절하게 구명운동을 편 끝에 어사중승 송악사의 변호로 처형을 면하고 758년 귀주성 야랑으로 유배되었다. 다음해 대장군 곽자의에 의해 구명, 사면되었다. 이후 금릉, 역양 등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762년 11월 안휘성 당도현령 이양빙의 집에서 객사했다. 옆구리가 썩어 들어가는 병이었다고 한다.
이백과 두보는 한시의 양대 기둥이다. 두보를 시성(詩聖)이라 하는 반면 이백은 시선(詩仙) 또는 하늘에서 쫓겨난 적선(謫仙)으로 불리운다. 두보가 정성껏 퇴고해 짓는 반면 이백은 종횡무진 생각나는대로 완성한다. 두보가 오언율시에 강한 반면 그는 악부 칠언절구(七言絶句)에 능하다. 그의 삶 자체가 하나의 완벽한 서정시라 할 수 있다. “내 취해 졸리니 당신도 가시게. 내일 아침 생각나거들랑 거문고 품고 오시게”(我醉欲眠君且去, 明朝有意抱琴來)와 같은 시구에서 그의 자유로운 영혼을 듬뿍 느낄 수 있다. <초당대 총장>
출생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다. 그의 집안은 간쑤성 룽시현에 살았고 부친은 서역의 상인으로 활동했다. 쓰촨성 창명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25세 무렵 촉을 떠나 중앙으로 나아갔다. 이때 촉 제일의 명산인 아미산에 관한 시 아미산월가(峨眉山月歌)를 남겼다. 이후 742년 42세때 장안에 들어갈 때까지 그의 흔적을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하남성, 산서성,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 안휘성, 절강성 등 광범위한 지방을 편력하였다. 호북성 강릉에서 도교 교단 지도자 사마승정을 만났는데 선풍도골(仙風道骨)의 품격이 있다는 찬사를 받았다. 이후 장강을 내려가 강남 문화의 중심지인 금릉과 양주에서 세월을 보냈다. 그동안 30여 만금을 탕진했다. 30세 무렵 호북의 안륙에 나타나 지역 명문인 허씨 가문의 딸과 결혼한다. 허씨 가문은 재상을 지낸 명가인데 그와 혼사를 결정한 것은 의외의 사건이다. 호방한 이백의 풍모에 끌려 사위로 맞이했다는 해석이 있다.
이백과 두보는 한시의 양대 기둥이다. 두보를 시성(詩聖)이라 하는 반면 이백은 시선(詩仙) 또는 하늘에서 쫓겨난 적선(謫仙)으로 불리운다. 두보가 정성껏 퇴고해 짓는 반면 이백은 종횡무진 생각나는대로 완성한다. 두보가 오언율시에 강한 반면 그는 악부 칠언절구(七言絶句)에 능하다. 그의 삶 자체가 하나의 완벽한 서정시라 할 수 있다. “내 취해 졸리니 당신도 가시게. 내일 아침 생각나거들랑 거문고 품고 오시게”(我醉欲眠君且去, 明朝有意抱琴來)와 같은 시구에서 그의 자유로운 영혼을 듬뿍 느낄 수 있다. <초당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