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을 언제 떠났노./ 파초의 꿈은 가련하다./ 남국(南國)을 향한 불타는 향수/ 너의 넋은 수녀(修女)보다도 더욱 외롭구나./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 나는 샘물을 길어 네 발등에 붓는다.(중략)

연일 폭염이 계속되면서 텃밭에 심어 놓은 울금과 고추 등 모든 농작물이 시들시들 맥을 못 추고 있다. 일주일에 두어 번 시골집에 가서 울금에 물을 줄 때면 파초와 닮은 이파리 때문인 듯 김동명 시인의 시 ‘파초’가 떠오르곤 한다.

퇴직 이후 부모님이 물러주신 밭뙈기를 그냥 버려둘 수 없어 짬짬이 고향집을 오가며 밭농사를 조금 짓고 있다. 그러니까 굳이 말하자면 도시 농부인 셈이다. 재배 종목은 고추, 울금, 고구마, 땅콩 등 식탁에 오를 만한 채소는 거의 다 심는다. 전문 농사꾼들이야 소품목 다량 생산으로 작업량을 줄이고 생산량을 늘리지만 초보 농사꾼인 나는 재미 삼아 이것저것 심은 탓에 일만 많고 소득은 없다. 소득이라면 땀 흘려 일하는 운동 외에 야채 가게를 조금 덜 이용하는 것뿐이다.

농사를 지으면서 자연의 위력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날씨가 순조롭고 비가 적당히 내려주면 적은 노력으로도 풍년 농사를 이룰 수 있지만 올해처럼 자연이 도와주지 않으면 인력으로 되는 일은 극히 미미하다는 것이다. 농사는 시작하는 순간부터 잡초와 병충해와의 싸움이다. 친환경을 염두에 두는 순간, 봄부터 가을까지 잡초는 농부와 숨바꼭질 하듯 뒤돌아서면 다시 돋아난다. 그 생명력만 놓고 보면 ‘잡초 같은 인생’이 가장 부러운 존재일수도 있겠다. 잡초와 더불어 농부를 괴롭히는 천적이 병충해다. 나와 내 가족이 먹을 것이란 생각으로 가급적 농약을 자제하지만 농약 없이 볼품 있는 농작물을 수확하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곤 한다.

엊그제는 밭에 나갔더니 아직 밑이 들지도 않은 고구마 밭을 멧돼지가 그 사이에 다녀갔다. 고구마 두렁을 줄줄이 파헤쳐 이제 겨우 손가락만한 고구마를 모조리 파먹고 줄기를 짓밟아 초토화시켜 놓았다. 무례한 녀석들이 주인의 허락도 없이 미리 시식을 한 것이다. 그러나 고구마 세 두렁을 지키기 위해 울타리를 칠 여력은 없으니 두고 볼 수밖에 없다.

아마 멧돼지 다음으로 농부들로부터 가장 미움 받는 조수는 까치일 것이다. 까치는 영리하여 땅콩과 다른 작물을 구분할 줄도 안다. 수확기가 되면 땅콩의 열매가 흙 속에 있는 것을 어찌 알고 줄기 밑 흙을 파헤치고 알맹이를 꺼내 먹는다. 허수아비나 바람개비는 그런 것들이 가짜라는 것을 녀석들은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까치의 피해가 예상되는 것은 그물로 덮기에 바쁘다.

시골길을 오가다 보면 농사를 짓지 않는 묵힌 논밭이 더러 눈에 띈다. 거의가 도시민들이 투기 목적으로 사놓고 묵히거나 고령의 농부들이 힘이 부쳐 농사를 포기한 논밭들이다.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이라 했다. 농지는 농사 짓는 사람이 소유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갖가지 편법으로 도시민들이 농지를 매입한 후 방치함으로써 여기저기 초목이 무성한 논밭을 보면 농촌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농촌의 고령화는 너무 심각하다. 자녀들은 모두 외지에 나가 있고 노부모들만 농촌을 지키고 있으니 세월이 갈수록 빈집은 늘어만 간다. 한낮에도 마을 안길은 쥐 죽은 듯 조용하다. 문득 넘쳐나는 도시 은퇴자와 청년 실업 인구를 농촌과 연계하여 상호 활로를 모색할 정책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계절의 순환은 어김이 없다. 폭염 속에서도 창밖 하늘은 날마다 깊어지고 조석으로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부는 것을 보면 가을이 어느덧 우리 곁에 와 있음이 느껴진다. 틈틈이 짬을 내어 텃밭을 가꾸고 땀 흘리며 자연과 교감하는 도시 농부의 삶, 할 일 없는 은퇴자에겐 또 하나의 소확행(小確幸: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