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9월 18일이 되면 선양, 하얼빈, 창춘, 난징 등 중국 100여 개 도시에서 경보음을 울린다. 일본의 만주침략 전쟁을 기억하자는 의미의 사이렌이다. 일본이 만주를 침공한 1931년 9월 18일을 중국인들은 치욕으로 여긴다. 이렇듯 중국 내 항일 유적지 어느 곳을 가더라도 ‘국치를 잊지 말자’(勿忘國恥)라는 글귀를 쉽게 볼 수 있다.

우리는 어떤가. 해마다 8·15 광복의 감격을 되새기는 사람은 많지만, 경술국치(庚戌國恥)를 제대로 아는 이가 이젠 드물다. 일제에 의해 주권을 빼앗겨 식민지로 전락한 치욕의 날이 1910년 8월 29일이다. 오늘이 바로 108번째 맞는 경술국치일이지만 달력, 수첩 어느 곳에도 특별한 날로 표시되어 있지 않다. 진영 논리에 집착해 ‘국치를 잊지 말자’는 역사의 본질과 교훈적 의미를 내팽개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지리산 구례 땅에 은거하던 한 선비가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소식을 듣고 절명시(絶命詩) 네 편을 남기고 자결하였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펴졌다. 그러자 선비들은 그의 시를 너도나도 베껴 외웠는데 그 한 구절을 보면 이러하다. ‘금수도 슬피 울고 산하도 찡그리니/ 무궁화 세상은 이미 망해 버렸다네/ 가을 등불 아래서 책 덮고 회고해 보니/ 인간 세상 식자 노릇 참으로 어렵구나’(황현의 절명시)

경남일보 주필이자 ‘시일야방성대곡’을 썼던 장지연이 매천 황현 선생의 절명시를 경남일보에 게재했다. 조선총독부는 신문을 압수했고 결국 폐간되는 필화 사건의 원인이 된다. 광양에서 태어나 구례에서 성장한 황현 선생의 ‘매천야록’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나는 (벼슬하지 않았으므로 사직을 위해) 마땅히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단지 나라가 오백 년간 사대부를 길렀으니, 이제 나라 망하는 날에 한 사람도 죽지 않는다면 그 또한 애통한 노릇이 아니겠는가.”

박은식의 ‘한국통사’에 따르면, 우리의 주권을 일제에 빼앗긴 망국을 한탄하며 목숨을 끊은 전국의 선비는 28명이다. 조정의 모든 벼슬아치와 각 고을을 다스리던 360여 수령 가운데 명단에 포함된 현직은 금산군수 홍범식과 주 러시아공사 이범진 2명뿐이다.

고려가 망할 때 많은 충신이 두문동으로 들어가 끝까지 충절을 지켜 고려의 망국을 슬퍼했다. 그러나 반만년의 역사와 3000리 강토, 1500만 민중을 일제에 바친 조선의 황실과 내각은 지극히 평온한 모습이었다. 왕실 일가와 후손의 예우 보장이라는 말을 믿고 순종은 조약을 성사시킨 ‘공로’로 이완용 내각에 훈장을 골고루 수여한다. 망국의 책임을 져야 할 고관대작들이 무더기로 훈장을 받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나라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처했을 때 하나로 결속하지 못한 대가는 혹독했다.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저들은 태평양전쟁까지 일으키고 숱한 젊은이들을 학도 지원병과 강제 징용 등으로 전쟁터와 군수 공장으로 내몰았다. 해방 이후 남북 분단과 처절한 동족상잔도 그 후유증이 아닌가.

이완용과 데라우치가 한일병합 조약을 체결한 곳이 서울 남산 자락의 통감관저다. 이 땅에 식민 사회가 시작된 국치의 현장이다. 그 치욕의 터가 ‘위안부 기억의 터’라는 공원으로 3년 전 문을 열었다.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를 기리는 반전의 장소로 탈바꿈한 것이다. 위안부 할머니 247명의 이름과 증언을 새긴 ‘통곡의 벽’에는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이 아픈 역사가 잊혀지는 것이다.’라는 글귀가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했다. 광복절과 함께 국치일을 잊지 말자. 부끄러운 역사를 용기 있게 드러내고 지난날의 치욕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성찰이 절실한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