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아침 저녁으로 쌀쌀한 늦가을 날씨입니다. 들녘에서 영글어 가는 곡식과 울긋불긋 곱게 옷 입은 단풍잎을 바라봅니다.

지난 뜨거웠던 여름, 광주 법원 입구 벤치에 앉아서 이러저런 이야기를 하셨지요. 휠체어에 겨우 몸을 맡기고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할아버지를 모시고 함께 식사를 했던 장 목사입니다.

할아버지께서는 몸이 망가져 식사도 제대로 못하는 상황이었지요. 방바닥에 그냥 앉을 수 가 없어서 방석을 겹겹이 해서 겨우 앉으시던 모습이 선합니다. 그 때 “내 나이가 90이 넘어서 얼마나 살지 몰라, 빨리 해결 되었으면 좋겠다”며 띄엄띄엄 말씀하셨지요.

그동안 할아버지가 당한 고통과 억울한 일, 말로 다 할 수 없겠지요. 할아버지께서는 열 일곱 살 꽃다운 나이에 일제의 노동력 징발 수단이었던 ‘근로 보국대’에 동원돼 일본에 끌려가셨지요.

이후 마이시 제철소에서 임금도 받지 못한 채 노역에 시달렸지요. 일본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일만 하셨지요. 철재를 나르다 그만 넘어져 3개월간 입원도 하지 못한 채 노역을 해야 했지요. 그 때 다친 상처는 배에 커다란 흉터로 남아 할아버지의 고단한 삶의 흔적으로 남게 되었지요.

할아버지, 얼마나 원통하고 억울하신가요. 임금은 고사하고 열악한 환경으로 피눈물 나는 세월을 보냈으니 말입니다. 삶의 곡절은 그 뿐이 아니었지요. 태평양 전쟁 중에 징병까지 되는 바람에 미군 포로 감시원을 하다가 해방 후 조국으로 돌아왔지요.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억울한 사연을 진정으로 알아주지도 이해해주지도 않았을 겁니다.

지난 화요일, 대법원에서 일제 강제 징용 손해 배상 청구 소송 재판이 있던 날입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새벽에 일어나 목도리와 양복을 입고 집을 나섰지요. 그때의 발걸음은 역사의 무게만큼 무겁기만 했을 겁니다. 송정역에서 KTX를 타고 서울로 가는 길에 무슨 생각을 하셨는가요.

할아버지. 이번 재판이 사실은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박근혜 청와대와 재판 거래가 있어서 늦어졌다는 사실은 알고 계셨지요?

법정에서 재판 시작 10여분 만에 김명수 대법원장이 “상고를 모두 기각한다” 주문을 읽을 때 할아버지는 눈물을 흘리셨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게서 “나까지 네 사람인데 혼자 재판받은 게 너무 많이 아프고 눈물도 납니다. 그 사람들이 복이 없었는지 같이 재판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 서럽기 짝이 없습니다”라고 이야기 하셨지요.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여운택, 신천수, 김규수 할아버지 네 분이 소송을 냈지만 하나 둘 친구들은 세상을 떠났지요.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연신 “감사하다”고 말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날 모든 언론들은 온통 할아버지 이야기를 했지요. 저는 그 시간에 시민 인권 강좌 ‘국제 인권 제도와 위안부 문제’에 대한 강좌를 듣다가 소식을 들었습니다.

할아버지의 ‘77년 한’ 을 풀었다고 하니 이것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을까요. 하지만 일본은 뻔뻔스럽게 “이 판결은 국제법에 비출 때 있을 수 없는 판단이다. 일본 정부는 의연히 대처하겠다”는 어처구니 반응을 보였습니다.

아직도 사법부의 진실과 정의의 길은 멀기만 합니다. 반드시 사법 농단을 밝혀 사법 적폐 청산으로 이어져 더 이상 억울한 이들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또 하나 지난 31일 근로 정신대 동원 피해자 김재림 할머니등 3명의 원고 피고인에 대한 고등법원 판결을 지켜보았습니다. 이후 시민모임에서 기자회견을 했습니다. 회견 내용은 그동안 정부가 행한 추악한 강제 징용 재판 거래에 대해 피해자들에게 사죄하고,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사법 적폐 장본인 등의 청산을 통해 역사 정의가 실현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춘식 할아버지! 비록 매서운 칼바람 부는 겨울이 올지라도 역사의 봄은 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되새기게 됩니다. 아무쪼록 건강하기를 바라며 저도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