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가 되는 과정에서, 의대생은 여러 과를 실습하는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의대 실습 학생을 병원에서는 폴리클[Polycle: Poly(다수)+Clinic(진료과)]이라고 부르는데, 이 기간은 의학 지식을 무조건 외우던 딱딱한 강의실에서 벗어나 실제로 환자를 보고 느끼면서 상대적으로 시간적 여유도 있는 의대생의 황금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이 폴리클 기간은 그동안 책으로만 배운 지식이 임상에서 실제 어떻게 적용되는지, 비록 깊이가 있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알게 되고 또한 각자 자신의 적성과 흥미에 따라 나중에 전공하고자 하는 과목을 결정하는데 큰 영향을 준다. 필자도 폴리클을 하면서 지금 하고 있는 정형외과를 선택해 오늘에 이르게 된 것 같다.

정형외과로 결정하게 된 많은 이유들 중에서 적성과 특기가 주된 요인이었지만, 특히 정형외과의 큰 매력은 환자를 완치할 수 있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뇌졸중, 고혈압, 치매나 내과적 중증 질환들의 주된 치료는 완치보다는 관리와 예방이지만, 정형외과 병들은 원인을 제거하면 좋아지는 치료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작했던 정형외과였지만, 조금 알고 나니 정형외과에서도 의사를 좌절시키는 완치 불가의 많은 질환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어려운 것이 목이나 허리를 다쳐서 신경 마비가 되신 분들이다. 의학이 발달하고 21세기 최첨단 치료법이 소개되고 있지만 아직도 정복하지 못하고 있는 분야가 중추신경 영역이다. 대학병원에서 근무할 때, 기억에 남는 여러 환자 중에서 아직도 마음 속에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남은 환자는 30대 여성으로 척추 손상 후 하반신이 마비됐던 분이다. 지금도 우리나라는 장애를 가진 채 사회생활을 하기가 무척 어렵기 때문이다.

사람은 크나큰 어려움이나 어떤 것을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되면, 정신적 반응 기제로 5단계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1단계는 부정(사실이 아닐 것이라며 인정하지 않는 것), 2단계는 분노, 3단계는 타협(현실적인 방법을 찾아보는 것), 4단계는 우울, 5단계는 수용인데 이중 4단계에서 5단계로 넘어가기가 어렵다. 특히 4단계 우울 상태에서 자살과 같은 극단적인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가족이나 동료의 관심과 배려, 사회적인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렇게 말하기는 쉬어도 환자가 본인의 절망적 상황에 대한 갈등과 번민, 역경을 정신적으로 극복하기는 정말 힘들다. 그래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끝까지 희망을 가지고 노력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얼마 전 외래 진료실에서 48세 남자 분을 만났다. 이 글을 쓰도록 동기를 주신 분으로, 20여 년 전 교통사고로 하반신 마비가 되셔서 휠체어를 타고 생활하는 상태였다. 이렇게 하반신을 전혀 못쓰고 또한 신경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통증을 느끼지도 못하지만, 이번에는 휠체어가 넘어지면서 발목이 골절돼 내원하셨다. 아무리 감각이 없더라도 골절로 인해 다리가 흔들리면 부기와 함께 부종이 생기고, 상처가 덧날 수 있기 때문에 수술적 고정 치료를 시행했다.

그런데 필자는 이 환자를 만나고 내심 큰 감동을 받았다. 이 분은 하반신 마비라는 엄청난 어려움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반인처럼 목소리도 밝고 활력이 느껴졌다. 환자는 자기가 할 일이 많고 바쁘다며 빨리 치료하는 방법을 문의해왔다. 정말로 그 환자분의 건강한 에너지가 치료하는 의료진도 느껴질 만큼 커서, 사실 의사로서 미리 하반신 마비의 안타까운 감정을 가지고 있던 내가 도리어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조금 힘들거나 어려운 일이 생기면 ‘힘들어’ ‘피곤해’라는 말을 자주 내뱉곤 했던 내 스스로를 반성하게 됐다.

결국 우리는 긍정과 희망을 놓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군대에서 훈련할 때 흔히 들었던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은 힘든 순간을 이겨내고 돌이켜 보면 여유가 생겨서 추억으로 넘길 수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장 포기하고 싶은 극심한 고통도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끝이 있다는 말이다. 물론 현실에서 우리의 삶이 쉽지 않지만 내게 감명을 주신 이 분처럼, 어떠한 힘든 상황이라도 결국 극복해 내면 행복과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