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2년 어느 봄날, 시인 박목월은 조지훈을 고향 경주에서 처음 만났다. 낮에는 신라 사적을 거닐고, 밤에는 문학과 삶을 얘기하며 열흘 넘게 어울렸다. 헤어져 고향으로 돌아간 지훈이 목월에게 감사의 편지와 함께 동봉한 시 한편이 ‘목월에게’라는 부제를 단 ‘완화삼’이었다. 감격한 목월은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이라는 ‘완화삼’의 일절을 부제로 한 시 ‘나그네’로 화답하였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두 시인이 함께 한 망중한(忙中閑)의 시간 덕분에 ‘북에는 소월, 남에는 목월’이라는 찬사를 낳게 한 작품이 태어났다. 여유와 함께 하는 삶이 부여하는 가치를 일화를 통해 되돌아보며, 한줄기 봄바람처럼 다가오는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 일과 삶의 균형)을 떠올리는 3월이다.

겨우내 움츠렸던 몸과 마음이 활짝 열리는 3월은 아이들에게는 새로운 학년을 맞는 달이다. 겨울잠에서 깨어나 따스한 햇살 속에서 꽃망울이 맺히듯, 새로운 선생님과 친구들에 대한 기대로 설레는 마음이 뜨거워지는 시간이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아이들의 ‘새 학기 증후군’(new semester blues)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등교 시간이 다가오면 배를 움켜쥐거나 두통, 어지러움을 호소하는 아이들이 있다. 새로운 선생님과 친구 등 변화한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상황에서 부모의 기대와 학업에 대한 부담이 겹치면서 신체적 아픔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수험생 뒷바라지로 애쓰다 자식을 대학에 보내놓은 부모에게는 ‘빈 둥지 증후군’(empty nest syndrome)이 나타날 수 있다고도 한다. 말 그대로 뒤치다꺼리에 정신 없었던 아이들이 떠나고 보니, 특별히 몸에 문제가 없음에도 여기저기 쑤신다. 소화도 잘 안 되고, 가슴이 답답하며 쉬 피로감을 느낀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는 ‘피로 사회’에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과잉 성과주의를 비판한 바 있다. 우리를 피곤하게 하는 것은 금지, 강제, 규율, 의무, 결핍과 같은 부정적 패러다임이 아니라 능력, 성과, 자기 주도, 과잉과 같은 긍정의 패러다임이란다. 그렇게 하라고 강요하거나 시키는 사람도 없건만 자신의 자유 의지로 더 많은 보상을 위해 죽도록 일하다, 그 결과로 죽음만큼 피곤해지는 인간성을 만들어 낸다는 통찰이었다.

피로 사회에서는 자신의 특기와 적성을 찾아가기보다는 기성세대의 획일주의에 휩쓸려 내가 누군지 모른 채 무작정 욕망을 키워가기 십상이다. 이 상황에서 긍정적 동기 부여인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오히려 자신을 옥죄는 덫이 되어, 자칫 스스로 정한 욕망을 충족하지 못하여 좌절감과 우울증에 빠지게도 된다. 차근차근 하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급히 추종하다 보면 도리어 엉키기 마련이니 치사분지(治絲분之)를 경구(警句)로 삼고, ‘사색, 무위와 심심함, 휴식의 가치’를 강조한 한 교수의 말을 돌아 볼 필요가 있다.

더불어 중요한 것은 세속의 가치에 맞춘 ‘무대 위의 배우’와 같은 삶에서 벗어나 자신의 생각에 따른 삶을 긍정하는 자세이다.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드라마 ‘SKY 캐슬’에서 강준상(정준호 분)은 “어머니와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았잖아요”라고 일갈했다. 무엇이 옳은지 생각해보지 않고 어머니 말만 들으며 살아온 삶에 대한 후회에서 나온 말이다. 전형적인 터널 안 시각에서 살아온 삶에 대한 자성이자, 이렇게 아이들을 키워온 일부 부모들에 대한 경종(警鐘)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이들은 부모의 ‘세속적’ 욕망에 의해서가 아니라 ‘세심하지만 무심한 듯한’ 격려와 지지를 안고 자신의 본성(결)대로 자라야 하고, 그 안에서 부모의 행복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성취를 향한 끊임없는 압박보다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에 집중함으로써 더 행복하고 여유 있는 삶을 누리는, ‘구름에 달 가듯이’ 스라밸(Study and Life Balance: 공부와 삶의 균형)과 함께 하는 3월을 맞았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