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껏 나에게 찾아오는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는 게 의사로서 나의 의무이고, 모든 것인 줄 알았다. 상당히 수동적인 생각이었다. 내가 전공하고 있는 정형외과 질환은 언뜻 보기엔 단순한 근육통이나 염증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지만, 사실 다른 질환인 경우가 적지 않다. 그래서 레지던트 기간 밤새워 공부했고, 지금도 공부가 필요함을 알고, 지속적으로 학회를 다니며 새로운 진단법과 병명을 익히고 있다. 평생 공부하는 게 의사의 숙명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전문의가 돼서 처음 직장이 종합병원이었는데, 퇴근 무렵에 오는 응급 환자가 있다. 야간에 수술하고 중환자실에서 환자를 돌보다 보면, 병원에서 지새는 날이 적지 않았다. 나보다 흉부외과 과장은 거의 매일 중환자실에서 생사를 오가는 환자와 함께했다. 그 당시 나에게는 흉부외과 과장이 롤 모델이었고, 나도 그분처럼 열심히 하리라 다짐했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보면 ‘나는 인종, 종교, 국적, 정당 정파, 또는 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 대한 나의 의무를 지키겠노라’라는 구절이 나온다. 나는 이 구절의 의미를 잘 몰랐다. 최근에야 이 구절을 실천하는 의사들이 주위에 많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런 분들을 해외 의료 봉사와 고려인 광주진료소에서 보고 있다.

고려인이 광주에 살기 시작한 지는 오래됐다고 한다. 고려인들은 모국이라 할 수 있는 이 땅에서 노동자로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의 삶이 열악하리라는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말도 잘 통하지 않고, 아파도 돈이 궁했던 고려인들에게 몇몇 의사들이 도와주기는 했지만 개인으로는 한계가 있었다고 한다.

올해 여러 기부자들의 도움으로 광산구 월곡동에 고려인 광주진료소가 세워졌다. 진료 환경이 많이 개선돼 매주 화요일 밤은 진료소 불이 환하다. 화요일에는 50여 명의 의료진이 돌아가면서 야간 진료까지 한다. 다들 각자 병원에서 진료하느라 피곤한 상태지만 고려인들의 고마워하는 눈길을 보면 금세 피로가 사라진다.

나는 진료소 총무로 한번씩 둘러봐야 할 때가 있는데, 갈 때마다 깜짝 놀란다. 뜨거운 진료실의 열기, 줄지어 링거를 맞고 있는 주사실의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천국이 있다면 이런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면 오버일까? 모 원장은 고려인 환자들이 안 잊혀져서, 매주 진료할 정도로 성의가 대단하다. 환자를 제대로 치료하기 위해 러시아어를 공부하는 정신과 원장도 있다. 약대생과 약사도 공부를 하면서 러시아어로 약에 대해 친절하게 복약 지도를 해준다.

대학 병원 간호사들이나 종합병원 간호과장들도 직접 고려인들에게 영양제 주사를 놓고 있다. 한의사도 바닥 매트에 무릎을 꿇고 정성으로 침과 부항을 해주고 있으니, 매주 화요일 저녁 진료소는 사랑과 정성으로 넘쳐난다.

진료소 총무로서 여러 의료인과 연락하고, 곁에서 지켜보면서 느낀 것은 봉사자 대부분이 많은 봉사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정말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개인적으로 희망이 있다면 젊은 의사들이 좀 더 참여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젊은 의사들은 바쁘다. 병원에서도 집안에서도 할 일이 많다, 그렇다 보니 주위를 둘러보기가 쉽지 않다. 6시 반이 되면 집에 들어와서 아내와 애들을 돌보는 가정적인 모습이 젊은 의사들이 꿈꾸고 있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바쁜 우리 후배들이 함께 동참한다면, 더 좋은 진료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부탁해본다.

또 다른 문제로는 고려인들이 만성이나 난치성 병이 생겼을 때 제대로 치료할 수 있는 시스템이 아직 갖춰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원이 더 필요할 뿐만 아니라 부작용과 후유증이 생길 수 있는 병에 대해서는 뒤에서 받쳐주고, 도와주는 제도와 사람들이 있어야 의료진들이 과감하게 치료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인 광주진료소는 아직도 배고프다. 많은 의료진의 참여와 지원이 절실하다. 성실한 의료진과 따뜻한 후원자들이 함께 한다면, 더 많은 고려인들이 건강하고 안전하게 지역 사회를 위해서 일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