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마한의 식생활
2020년 05월 06일(수) 00:00
마한의 먹거리는 어떻게 생산되고 조리되었을까?
벼·밀·보리 등 다양한 경작물 재배
품종 개량 위한 노력 꾸준히 이뤄져

마한의 부엌 (2016년 국립광주박물관 특별전)

고고학자 임영진 교수가 본 마한

<9> 마한의 식생활



마한의 생활문화에 있어 기본이 되는 衣, 食, 住 가운데 이번에는 식생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의 주식으로 정착되어 있는 쌀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먹거리들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은 우리 문화의 기원 문제를 푸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



◇마한의 먹거리에 대한 문헌기록

‘후한서’를 보면 마한 사람들은 농사를 짓는다는 기사와 함께 배만큼 큰 밤과 꼬리가 5척이나 되는 닭이 있다는 기사가 있다. 해마다 5월에는 농사일을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밤낮으로 술과 노래와 춤을 즐기고, 10월에 추수를 끝내고도 그와 같이 한다는 기사도 보인다.

앞의 기사는 먹거리 종류에 관한 것이고, 뒤의 기사는 봄에 씨앗을 뿌리고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과 가을에 추수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축제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마한의 농사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기사를 찾아볼 수 없는데 이는 큰 밤과 긴꼬리닭에 대해 기록을 남긴 것과는 대조가 된다.

아마도 마한의 농사 내용이 중국과 비슷해서 굳이 자세하게 기록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수렵이나 목축에 치중하였던 다른 종족 과 구별하기 위해 마한에서 농사를 지었다는 사실 만큼은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쌍촌동 마한 마을 항아리에서 출토된 탄화된 밤.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된 농경

우리의 신석기시대에는 기원전 4000년경부터 조, 수수, 기장과 같은 곡물이 재배되었지만 이는 전체 먹거리 가운데 극히 일부에 불과하였다. 그나마도 자생종을 개량한 것이 아니라 기원전 7000년경부터 중국 요녕지역에서 재배되어 왔던 품종들이다.

기원전 4000년경은 전세계적으로 기온이 하강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요녕지역 경작물들이 보다 적합한 서식지를 따라 남쪽으로 확산되었던 것이며 이는 빗살무늬토기의 등장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와 달리 지금까지 나주에서 유명하였던 배가 머지않아 황해도 쯤에서나 재배되고 나주에서는 배 대신 귤이나 커피콩 등이 재배되는 것은 온난화에 따른 피하기 어려운 변화일 것이다.

대부분의 동식물은 각각 적합한 서식 환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자연환경이 비슷한 시기에는 동서방향으로 손쉽게 확산되지만, 추워지는 시기에는 남쪽, 더워지는 시기에는 북쪽으로 옮겨 가는 것이 자연의 순리이다.

청동기시대에는 본격적인 농경이 시작되면서 밀, 보리, 콩, 팥 등과 함께 쌀이 재배되었다. 밀과 보리는 근동지역에서 중국을 거쳐 유입되었는데 재배시기가 벼와 다르기 때문에 보완 작물로 재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콩과 팥은 청동기시대부터 확인되고 있지만 동북아시아가 자생지이기 때문에 신석기시대까지 올라갈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벼는 탄화미, 수침벼, 꽃가루, 규산체, 압흔 등을 통해 그 존재를 파악할 수 있는데 1920년 김해패총에서 처음으로 탄화미가 발견된 이후 각지에서 다양한 증거들이 확인되고 있다.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는 탄화미, 밀, 오이(참외), 박 등과 함께 최대 두께 1.5m에 달하는 벼 껍질층이 발굴되어 기원전 1세기에 본격적인 벼농사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벼는 기원전 10000년경에 중국 양자강유역에서 시작되었는데 청동기시대에 육로를 통해 요동반도를 거쳐 서북한으로 들어왔다는 견해와 산동반도를 거쳐 해로를 통해 김포만으로 들어왔다는 견해가 있다. 벼는 기후 변화에 매우 민감한 작물로서 당시 산동반도까지 확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지만 요동반도에서 재배되었다는 증거를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에 산동반도에서 해로를 통해 중서부지역으로 파급되었을 가능성이 더 높을 것이다.



농기구 (2013년 국립광주박물관 특별전)
◇마한의 농사방법과 조리방법

농사에 있어서는 품종과 함께 농기구와 재배환경이 중요하다. 지속적인 품종 개량과 농기구 개발, 관개 등이 이루어지면서 생산량을 늘려 나가는 것은 사회적으로 당연한 일이었다.

농기구에 있어서는 낫, 보습, 따비, 쇠스랑, 쟁기 등이 많이 보이는데 철제품 외에도 다양한 목제품이 사용되었다. 신창동에서 출토된 목제품 가운데 가장 많이 출토되는 것은 낫자루이다.

마한의 철제 낫은 같은 곡물이라도 익는 시기가 달라 익은 순서대로 이삭 하나하나 목을 따내는 용도였던 청동기시대 반달돌칼과 달리 같은 시기에 함께 익은 이삭들을 줄기째 수확하는 도구였다. 따라서 철제 낫이 성행하는 시기에는 일괄 수확이 가능한 수준까지 작물 개량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밀과 보리는 청동기시대 알곡보다 마한 알곡이 더 크기 때문에 생산량 증대를 위한 노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벼 역시 청동기시대보다 낟알이 길고 폭이 넓어졌다. 이와같은 변화의 배경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신창동 시기에는 개량된 품종이 재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벼는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높기 때문에 식량으로서의 가치가 점점 커져 나갔는데 신창동 시기에 나타나는 시루는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시루의 등장은 쌀을 끓여 먹었던 청동기시대와 달리 쪄먹는 조리법이 나타났음을 의미한다.

이는 충분한 쌀 생산을 기반으로 한 것이며 신창동에서 확인된 두꺼운 벼 껍질층이나 창고시설이 입증해 줄 것이다.



복원된 창고와 현악기 (2013년 국립광주박물관 특별전)
◇마한의 수렵, 어로, 채집

마한 사회에서는 농경 외에도 가축사육, 수렵, 어로, 채집 등이 병행되었다. 특히 1~3세기에는 해안도서지역에 많은 패총이 형성되었는데 신석기시대 이후 사라졌다가 다시 성행한 것이기 때문에 주목된다.

일반적으로 패총은 해양자원의 집중적인 채집을 반영하는데 이는 당시 환경이 농경만으로는 충분한 식량을 확보하기 어려웠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마한의 패총은 농경이 일반적이지 않았던 신석기시대 패총과는 형성 배경이 다르다. 기원 전후 시기의 전세계적인 한냉화와 관련된 불가피한 것이었다. 전남의 몇몇 섬에서는 조선시대 패총들도 확인되었는데 이 역시 전세계적인 소빙기와 관련된 것으로서 당시 왜구 피해를 막기 위해 해금정책이 실시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섬들에 패총이 형성된 것은 해양자원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일부 백성들의 호구지책 때문이었다.

마한 시기에는 일시적인 한냉화로 인해 어려움에 처했던 때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식생활은 풍족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된 목제 현악기는 경제적인 풍요 속에서나 누릴 수 있었던 여유로운 생활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전남대 문화인류고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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