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군 총에 동생 보내고 ‘폭도 가족’ 낙인…‘5월 알리미’로
2022년 05월 11일(수) 21:15 가가
[우리 가족의 5·18 그리고 나의 5월-고 박병규·형 박계남씨 이야기]
서울서 내려왔다 참상 목격한 동생
도청 ‘최후 항전’서 주검으로 발견
형 계남씨 입사 시험 번번이 낙방
학원 운영하며 가족 생계 책임 져
5·18묘지 소장 지낸 여동생 숨지자
묘지 매점서 일하며 광주 알리미로
서울서 내려왔다 참상 목격한 동생
도청 ‘최후 항전’서 주검으로 발견
형 계남씨 입사 시험 번번이 낙방
학원 운영하며 가족 생계 책임 져
5·18묘지 소장 지낸 여동생 숨지자
묘지 매점서 일하며 광주 알리미로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옛 전남도청에서 최후까지 항쟁한 고 박병규(1960~1980년)씨의 형 박계남(66)씨가 국립5·18민주묘지 매점에서 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명주 기자 mjna@
광주시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주차장 한켠에는 매점이 있다.
5·18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이 잠든 묘지로 가는 길 주차장 오른편 ‘민주관’이란 이름의 건물 1층에 자리잡은 조그만 매점이다. 매점 운영자는 북구 동림동에 사는 박계남(65)씨.
1년을 하루 같이 웃는 낯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박씨는 5·18 해설사처럼 80년 5월 광주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매점 주인이다. 5·18 알리미를 자처하는 그는 매점 매출을 올리는 데는 뒷전이고 방문객들에게 5·18을 알리는 데 되레 열을 올리는 열혈 광주시민이다.
매점 주인 박씨에겐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남동생이 5·18 시민군으로 활동하다 항쟁 마지막 날인 1980년 5월 27일 옛 전남도청에서 산화했고 그 뒤로 한동안 온 가족이 ‘폭도의 가족’으로 낙인찍혀 살았기 때문이다.
그의 동생 병규씨는 동국대 1학년 학생이던 스무 살의 나이로 계엄군의 총탄을 맞고 운명했다. 그의 부모님은 아들 둘과 딸 넷을 뒀는데 큰아들이 계남씨, 죽은 병규씨가 바로 아래 동생이었다.
무탈하게 서울서 대학을 다니던 병규씨는 12·12 군사반란으로 정국 주도권을 쥔 전두환 신군부로 인해 시국이 어수선해지자 부모님 부름을 받고 고향 광주로 내려왔다.
식당을 운영하던 사촌누이로부터 “서울서 매일같이 학생들 데모가 크게 나고 있으니 빨리 병규를 내려오게 하라”는 말을 접한 부모가 광주행을 독촉했다고 한다. 가족의 운명이 뒤바뀐 순간이었다.
그해 19일 광주에 온 병규씨는 부모님의 바람과는 달리 곧장 전남대 후문에서 벌어진 학생들 시위에 참여했다.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공수부대가 무고한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때리는 것을 보고 피가 끓어올랐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2~3일 시위에 참여한 병규씨는 ‘계엄군을 광주에서 몰아내고’ 도청을 사수한 뒤에야 양동 고향집을 찾았다.
집에 머무른 것도 잠시 계엄군이 총공격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듣고 또다시 집을 나섰다.
병규씨는 도청 상황실에서 계엄군이 다시 광주로 밀고 들어올 것을 알고 끝까지 도청을 사수하기로 한 다른 시민군들과 함께 마지막 항전을 준비했다. 죽음을 직감했을까. 27일 새벽 숨지기 불과 몇시간 전 그는 집에 전화를 드렸다. “어서 빨리 집에 오라”는 어머니에게는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금방 들어갑니다”며 웃는 목소리로 안심시켰다. 그게 병규씨의 마지막이었다.
동생 죽음의 슬픔도 잠시.
계남씨를 비롯한 가족에게는 이때부터 ‘폭도의 가족’이라는 낙인이 따라다녔다.
군 생활을 하던 계남씨는 ‘관심사병’으로 분류됐고, 고참들에게 불려가 ‘동생이 북한에서 학교를 다니냐’는 말도 안 되는 질문을 받아야 했다. 광주에 있던 가족은 ‘빨갱이’가 됐다. ‘낙인’은 계남씨가 군을 제대한 뒤에도 지워지지 않고 그의 삶을 괴롭혔다. 직장을 구하려고 입사시험을 볼 때마다 번번이 낙방했다.
“필기시험과 면접을 통과했는데 마지막 신원조회 단계에서 떨어졌어요. 한 군데 회사도 아니고 3개 회사에서요. 이상하다. 이상하다 했더랬죠. 지금은 회사 이름이 생각나지 않지만, 면접 과정에서 ‘부모님이 1·4 후퇴 때 북한에서 내려 온 것 아니냐’는 질문도 받았습니다. 숨이 턱턱 막히더라고요.”
그 뒤로 계남씨는 번듯한 회사에 들어가겠다는 뜻은 완전히 접었다.
그래도 장남이었기에 좌절할 틈이 없었다. 곧바로 생계 전선에 뛰어들었다. 양동에 영어학원을 차린 것이다. 비상한 각오로 수업에 임했더니 수강생이 절로 늘었다. 계남씨가 학원사업에 재미를 붙여갈 때 어머니와 여동생 박경순(5·18민주묘지 소장 역임·2007년 별세)은 5·18유족회에 몸담고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1980년대 중반 무렵이었다. 군과 경찰, 기관원들의 감시와 탄압을 뚫고 모친과 여동생이 5·18 희생자 규합, 진상 규명 촉구 운동에 정성을 쏟을 때 계남씨는 묵묵히 경제적 지원을 도맡았다.
학원 사업에 열중하던 계남씨의 삶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2000년쯤이다.
그해 노모가 별세하고, 2007년엔 병을 앓던 여동생 경순이 세상을 등졌다. 남아 있던 여동생들은 한국에 정붙이고 살기 싫다며 미국으로 떠났다.
형제들이 떠나 외톨이가 된 계남씨는 3년을 방황하고 아팠다. 결국, 2014년 학원사업을 완전히 정리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5·18을 제대로 공부해보기로 한 것이다. 한동안 소홀했던 건강도 챙겼다. 그러길 2년, 계남씨는 2016년 5·18민주묘지 매점 운영자로 돌아왔다.
최소한의 생계비를 벌면서 5·18 묘지를 찾는 외지인과 외국인 등 방문객에게 5·18 알리미를 자처한 것이다. 매점 앞 휴게소 창문에는 80년 5월 광주 사진을 걸어놓고 매점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틈나는 대로 5·18에 관한 이야기를 건넸다.
특히 영어학원 강사 경험을 살려 외국인들에게는 영어로 소상히 5·18을 알렸다.
계남씨는 “감개무량입니다. 폭도의 가족으로 낙인 찍혔던 게 엊그제 같은데, 5·18이 민주화운동으로 자리 잡고, 국립묘지로 조성되고, 국내외에서 5·18을 추모하고 배우겠다고 앞다퉈 오고 있잖아요”라며 “제 건강이 허락하는 한 매점에서 묘지를 찾는 방문객에게 80년 5월을 알리는 데 힘을 쏟겠습니다”
/정병호 기자 jusbh@kwangju.co.kr
5·18민주화운동 희생자들이 잠든 묘지로 가는 길 주차장 오른편 ‘민주관’이란 이름의 건물 1층에 자리잡은 조그만 매점이다. 매점 운영자는 북구 동림동에 사는 박계남(65)씨.
1년을 하루 같이 웃는 낯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박씨는 5·18 해설사처럼 80년 5월 광주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매점 주인이다. 5·18 알리미를 자처하는 그는 매점 매출을 올리는 데는 뒷전이고 방문객들에게 5·18을 알리는 데 되레 열을 올리는 열혈 광주시민이다.
남동생이 5·18 시민군으로 활동하다 항쟁 마지막 날인 1980년 5월 27일 옛 전남도청에서 산화했고 그 뒤로 한동안 온 가족이 ‘폭도의 가족’으로 낙인찍혀 살았기 때문이다.
그의 동생 병규씨는 동국대 1학년 학생이던 스무 살의 나이로 계엄군의 총탄을 맞고 운명했다. 그의 부모님은 아들 둘과 딸 넷을 뒀는데 큰아들이 계남씨, 죽은 병규씨가 바로 아래 동생이었다.
무탈하게 서울서 대학을 다니던 병규씨는 12·12 군사반란으로 정국 주도권을 쥔 전두환 신군부로 인해 시국이 어수선해지자 부모님 부름을 받고 고향 광주로 내려왔다.
그해 19일 광주에 온 병규씨는 부모님의 바람과는 달리 곧장 전남대 후문에서 벌어진 학생들 시위에 참여했다.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공수부대가 무고한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때리는 것을 보고 피가 끓어올랐기 때문이었다.
집에 머무른 것도 잠시 계엄군이 총공격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듣고 또다시 집을 나섰다.
병규씨는 도청 상황실에서 계엄군이 다시 광주로 밀고 들어올 것을 알고 끝까지 도청을 사수하기로 한 다른 시민군들과 함께 마지막 항전을 준비했다. 죽음을 직감했을까. 27일 새벽 숨지기 불과 몇시간 전 그는 집에 전화를 드렸다. “어서 빨리 집에 오라”는 어머니에게는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금방 들어갑니다”며 웃는 목소리로 안심시켰다. 그게 병규씨의 마지막이었다.
동생 죽음의 슬픔도 잠시.
계남씨를 비롯한 가족에게는 이때부터 ‘폭도의 가족’이라는 낙인이 따라다녔다.
군 생활을 하던 계남씨는 ‘관심사병’으로 분류됐고, 고참들에게 불려가 ‘동생이 북한에서 학교를 다니냐’는 말도 안 되는 질문을 받아야 했다. 광주에 있던 가족은 ‘빨갱이’가 됐다. ‘낙인’은 계남씨가 군을 제대한 뒤에도 지워지지 않고 그의 삶을 괴롭혔다. 직장을 구하려고 입사시험을 볼 때마다 번번이 낙방했다.
“필기시험과 면접을 통과했는데 마지막 신원조회 단계에서 떨어졌어요. 한 군데 회사도 아니고 3개 회사에서요. 이상하다. 이상하다 했더랬죠. 지금은 회사 이름이 생각나지 않지만, 면접 과정에서 ‘부모님이 1·4 후퇴 때 북한에서 내려 온 것 아니냐’는 질문도 받았습니다. 숨이 턱턱 막히더라고요.”
그 뒤로 계남씨는 번듯한 회사에 들어가겠다는 뜻은 완전히 접었다.
그래도 장남이었기에 좌절할 틈이 없었다. 곧바로 생계 전선에 뛰어들었다. 양동에 영어학원을 차린 것이다. 비상한 각오로 수업에 임했더니 수강생이 절로 늘었다. 계남씨가 학원사업에 재미를 붙여갈 때 어머니와 여동생 박경순(5·18민주묘지 소장 역임·2007년 별세)은 5·18유족회에 몸담고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1980년대 중반 무렵이었다. 군과 경찰, 기관원들의 감시와 탄압을 뚫고 모친과 여동생이 5·18 희생자 규합, 진상 규명 촉구 운동에 정성을 쏟을 때 계남씨는 묵묵히 경제적 지원을 도맡았다.
학원 사업에 열중하던 계남씨의 삶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2000년쯤이다.
그해 노모가 별세하고, 2007년엔 병을 앓던 여동생 경순이 세상을 등졌다. 남아 있던 여동생들은 한국에 정붙이고 살기 싫다며 미국으로 떠났다.
형제들이 떠나 외톨이가 된 계남씨는 3년을 방황하고 아팠다. 결국, 2014년 학원사업을 완전히 정리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5·18을 제대로 공부해보기로 한 것이다. 한동안 소홀했던 건강도 챙겼다. 그러길 2년, 계남씨는 2016년 5·18민주묘지 매점 운영자로 돌아왔다.
최소한의 생계비를 벌면서 5·18 묘지를 찾는 외지인과 외국인 등 방문객에게 5·18 알리미를 자처한 것이다. 매점 앞 휴게소 창문에는 80년 5월 광주 사진을 걸어놓고 매점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틈나는 대로 5·18에 관한 이야기를 건넸다.
특히 영어학원 강사 경험을 살려 외국인들에게는 영어로 소상히 5·18을 알렸다.
계남씨는 “감개무량입니다. 폭도의 가족으로 낙인 찍혔던 게 엊그제 같은데, 5·18이 민주화운동으로 자리 잡고, 국립묘지로 조성되고, 국내외에서 5·18을 추모하고 배우겠다고 앞다퉈 오고 있잖아요”라며 “제 건강이 허락하는 한 매점에서 묘지를 찾는 방문객에게 80년 5월을 알리는 데 힘을 쏟겠습니다”
/정병호 기자 jusbh@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