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어느 마을 할머니들의 하루 - 박용수 수필가·동신여고 교사
2023년 12월 17일(일) 22:00
늦은 밤, 전화가 울렸다. 내일 화순으로 코로나 예방주사 맞으러 가신단다.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를 생각해서 새벽 시골로 향했다. 맞지 않아도 된다고 했더니 큰일 날 소리란다. 맞지 않고 마을회관에서 기침이라도 하면 눈총이 이만저만이 아니란다.

마을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 없단다. 차는 여섯 명, 두 명이나 정원 초과다. 뒷좌석에 아흔 살 먹은 할머니 네 분이 앉았다.

“어따, 어서 죽어야 쓸 것인 디! 빨리 죽어야지, 자다가 그대로 갔으면 쓰것다.”

장자굴 할매다. 매일 죽는다는 말을 주술처럼 반복한 지도 벌써 십 년이 넘었다.

“아따, 좀 빨리 걸으시오, 속 터지 것소 잉.”

이웃집 흘미 댁 걸음을 재촉하는 남촌 댁 소리다. 흘미 할매는 무릎 때문에 꼭 펭귄처럼 걷는다. 신세 덜 끼친다고 정류장까지 동행하셨단다. 흘미 할매가 방시레 웃으신다.

가뜩이나 좁은 차 안은 요란하다. 듣거나 말거나 서로 말하기 바쁘다. 신경 써서 듣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안 듣지도 않는다. 그러다 별 웃을 거리도 아닌데 웃음꽃이 만발한다.

속아서 시집왔단다. 부자는 무슨 부자, 넙덕지만 한 땅도 없더란다. 하도 배가 고파서 밤에 몰래 친정 능주까지 갔는데, 출가외인이라고 아버지는 문도 열어주지 않더란다. 그 뒤로는 죽기 살기로 살면서 지금 전답을 일궜단다. 아버지를 미워해야 할지 고마워해야 할지 모르겠단다.

가난한 옛날 이야기는 해도 끝이 없다. 이미 이야기 부자다.

토요일인데도 오전 7시 30분에 화순 읍내 병원은 문을 열었다. 의사 선생님은 75세, 빛바랜 환자 신상 카드가 박물관처럼 빽빽하다. 오래돼서 모두 정겹다.

“근데 주삿값이 을매여?”

“그래? 늙어서 존 것도 있네? 잉”

65살 넘으면 공짜라는 능주 댁 말에 똑같이 웃음꽃이 핀다.

“아 글쎄 빨리 가야 쓴디, 저승사자는 뭐하고 안 오는지 몰라.”

장자굴 할매가 또 시작했다.

“그 거짓말하지 마씨요. 빨리 죽어야 쓴다고 빌면 더 안 온답디다. 죽도 않을람서…”

“그거 몰랐어, 멍청이야, 100살까지 살라고 일부러 그런 것이야.”

장자굴 할매의 대답에 모두 박장대소다. 이왕 살았으니 200살까지 사시겠단다. 좋은 세상 만났으니 억울해서 못 죽겠단다. 그래서 반대로 주문을 왼단다.

국밥집에 정차했다. 할머니들은 시방이 열 신데 점심을 먹느냐고 마다신다.

운전대 잡은 내가 이길 수밖에 없는 일, 국밥집으로 모셨다. 이리저리 실랑이를 벌이다가 세 그릇을 시켰다. 여섯 명인데, 내가 한 그릇, 다섯 분이 두 그릇을 나눠 먹으면서도 배가 부르신단다. 소주도 한 병 시켰다.

‘아침부터 누가 해장하는가니?’

그러시면서도 한 잔씩 들이켜신다. 웃음이 턱에 걸렸다.

노인들이 제일 고픈 것은 밥이 아니라, 말인지 모른다. 당신들이 가장 무서운 것은 정적, 고요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소리, 떠드는 소리가 무작정 좋은 모양이다.

돌아오는 길 내내 차 안은 훈훈하고 웃음이 넘쳐났다. 그러는 동안 남자들보다 훨씬 더 차별받고 산 할머니들, 이분들이 왜 더 장수하고 행복할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딱 하나, 할아버지들에게는 없는 게 있었다. 그건 정치였다. 아니, 네 편 내 편, 편을 가르는 이념이 없었다.

한 마을로 시집와서 평생을 같이 산 가족이나 다름없는 이들이다. 지금껏 고생했지만, 이분들보다 더 행복한 세대는 어쩌면 영영 없을지 모른다. 그건 ( )이다.

그들의 수다 속에 마을에 도착했다. 차비를 건네주는 할머니들에게 100년 뒤에 받겠다고 했더니 함박웃음이다. 150년 뒤에는 꼭 밥도 얻어먹어야겠다고 손을 흔들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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