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의 향기] 덮어주는 사람- 박용수 수필가·동신여고 교사
2024년 10월 28일(월) 00:00
탕탕탕! 총소리가 콩 볶듯 했다. 조대 병원에서 남광주시장 쪽 가파른 언덕 그 벚나무와 산죽 사이에서 무언가 세차게 굴러떨어졌다. 난 피투성이 청년을 붙들고 그 옆 학동 작은 골목으로 숨었다. 10시가 훌쩍 넘었으니 어둠이 우리를 숨겨주었다지만, 골목으로 들어가는 우리를 봤을 것이다. 공수부대원 두 명, 분명 총을 들고 있었다. 순간 죽었다고 생각하고 벽에 바짝 붙어 두 눈을 꼭 감았다. 숨 막히는 순간, 고개를 내미니 아무도 없었다. 그때야 발등에서 피가 난 사실을 알았다. 80년 5월, 낯선 고샅에 들어서자니 겁도 났겠지만, 무엇보다 그들은 우리 둘을 일부러 모른 척 지나갔음이 분명했다.

중학교 때 일이 떠올랐다. 친구 여섯이 옆 마을로 닭서리를 갔다가 주인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주인보다 지서장이 더 자기 일처럼 노발대발했다. 그 바람에 우리는 죽는 줄 알고 엉엉 울며 사정했다. 다행히 주인은 적지 않은 닭값을 받고 흔쾌히 돌아갔다. 커서 알았다. 지서장이 우리 잘못을 덮어주었다는 것을.



오늘 작은 일로 화를 냈다. 살다 보면 일들이 얽히고설킨다. 그런데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만 그의 허물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의 잘못이 없지 않지만 내가 조금만 더 참고 따뜻하게 덮어줄 수도 있었다.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온통 음모와 배신 살생과 전쟁으로 가득 찼다. 작은 잘못도 침소봉대하고, 없는 죄도 만들어 모함하여 상대를 제거하여 제 입지를 공고히 한다. 상대의 허물을 찾아내려 안달이지, 가리고 덮어주려는 경우는 거의 찾기 어렵다.

설령 자기 잘못이 있더라도 그 처벌이 가혹하면 누구나 원한을 품고 반란을 꾀하거나 복수를 생각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그 허물을 질책하지 않고 덮어주었을 때, 백성은 임금에게 신하는 주군에게 감동하고 충성한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대부분 상대 허물을 드러내놓기를 주저하지 않고 살아간다.

남의 허물을 말하지 마라. (口不言人之過) 그래야 군자(庶幾君子) 라는 명심보감 교훈처럼 난 그러지 못했으니 그가 날 곱게 볼 일이 없다. 어리석은 사람은 용서도 잊지도 않는다. 순진한 사람은 용서하고 잊는다. 현명한 사람은 용서하지만 잊지 않는다는 말이 스친다.

초가을만 되도 난 바지를 내려 그때 난 발등 상처를 덮어준다. 어머니는 늘 내 잘못이나 실수를 허물없이 덮어주었다. 내가 키를 머리에 쓰고 소금을 받아올 때도 안아주셨고, 몽정할 때도 그랬다. 친구와 싸우고 왔을 때도 아버지께서 알까 봐 덮기 바빴다. 덮어준다는 말에는 모른 척 외면이 아닌, 닭이 알을 품듯 모른 척 품어주는 일이다. 찐빵 속 팥소 같은 끈끈한 그 무엇이 들어있어야 한다.

덮어준다는 일은 짓누르지 않는 포근한 무게여야 한다. 마른 대지를 적시는 봄비처럼, 걸인의 손길을 잡아주는 연민처럼, 새싹이 얼지 않도록 세심히 살피는 농부처럼, 배고픈 새끼에게 젖을 물리는 어미처럼, 어린 새가 비에 젖지 않도록 날개를 펴주는 어미 새처럼, 지친 대지를 덮어주는 흰 눈처럼, 솜이 목화씨를, 과육이 씨앗을 감싸고 있는 모양처럼 연민과 희생이 들어있어야 한다.

덮어주는 일은 시간과 인내도 필요하다. 그 사람의 허물을 까발려 당장 고치기는 쉽다. 하지만 어느 정도 숙성되어 스스로 발아하도록 드러내지 않고 기다리는 일은 고된 방법이다.

요즘 사람들은 좀처럼 타인을 덮어주지 않는다. 이념과 종교가 다르다고 까발리기 바쁘고, 정치도 검사 출신들을 전면에 내세워 상대방을 발가벗기기 급급하다. 이웃의 사소한 문제도 신상 털기 바쁘다. 나 역시 살면서 딱히 누군가를 덮어준 기억이 별로 없다.

그 지서장이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였다면 어린 우리 여섯 명의 인생은 뒤틀렸을지도 모른다. 그 공수부대원들이 총을 쏘거나 들이밀었다면 나와 그 부상자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다. 긴박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용기, 덮어주는 힘이야말로 들추고 까발리기 급급한 오늘날, 우리에게 세상 사는 지혜를 일깨워 준다.

사랑하는 일은 누군가의 단점을 덮어줄 사랑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살면서 누군가의 상처를 덮어주고 사는 이는 잘 산 사람이다. 추운 밤 이불을 덮고 자듯 오늘부터는 세상 허물을 덮고 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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