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Hip)한 가을 사치- 정유진 코리아컨설트 대표
2024년 10월 28일(월) 00:00
더운 여름이 있었기나 했나. 감쪽같이 나타난 가을 정취가 곳곳에서 흠씬 풍긴다. 먼 산이 붉게 물들고 동네 슈퍼 입구엔 잘 익은 단감이 탐스럽게 놓인 걸 보니 분명 가을이다.

계절의 풍요로움이 가득한 가을만큼 독서를 먼저 떠올리게 하는 계절이 없다. 가을이 유독 독서의 계절로 일컬어지게 된 유래는 오래 전부터다. 중국의 당나라 문장가이자 사상가 그리고 정치가였던 한유는 자신의 아들에게 독서를 권장하기 위해 시를 썼다고 한다. 잘 알려진 바 대로 그가 쓴 시에서 신선한 가을 바람에 등불을 가까이하여 글읽기에 좋다는 뜻으로 해석되는 사자성어 ‘등화가친(燈火可親)’이 오늘날에까지 전해졌다.

하지만 가을처럼 독서하기 힘든 때도 없다. 마음을 들뜨게 할 정도의 청명한 날이 많은데다 덥지도 춥지도 않다. 이 때가 아니면 보기 어려운 아름다운 정경과 제철 산해진미가 전국 도처에 넘치고 있으니 책만 들여다보기엔 아쉬운 계절이다.

아닌 게 아니라 가을 독서가 말뿐임을 방증하듯 일 년 중 책이 가장 적게 팔리는 때가 가을이라고 한다. 책 읽는 시간으로 세계 꼴찌로도 꼽힌 전적이 있는 우리나라는 2007년 독서문화진흥법을 제정한 뒤 가을이 시작되는 9월을 ‘독서의 달’로 선포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출판물 판매와 도서관 도서 대출의 통계 수치까진 끌어 올리진 못했었다.

그런 가을이 올해부터 바뀌었다. 말 그대로 독서의 계절이 된 것이다. 모두가 크게 기뻐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덕분이다. 그리고 한 가지 빠질 수 없는 변화의 요인이 있다. 독서의 계절이 오기 전부터 시작한 젊은 층의 유난한 책 사랑이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세계적으로 독서 경험을 공유하며 일기 시작한 책 읽기 붐은 우리나라에도 이어졌다. 디지털 네이티브로 불리는 Z세대가 아날로그적인 감성에 호감을 느끼고 옛 물건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꽤 오래 전부터다. 이런 레트로 감성에서 종이에 인쇄된 책 읽는 활동을 멋지다고 여기고 따라하면서 ‘글’을 뜻하는 ‘Text’와 ‘멋있다’는 의미의 ‘Hip’이 결합된 ‘텍스트 힙(Text Hip)’이란 신조어도 탄생되었다.

대중문화 전문가들의 견해로는 Z세대의 텍스트 힙은 그동안 인터넷, 소셜미디어를 통해 수많은 이미지와 영상을 보며 피로감을 느낀 데서 오는 반동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구하기 힘든 물건의 소유나 하기 어려운 드문 활동이 소셜미디어 상에서 드러내고 싶은 사치의 영역이므로 텍스트 힙은 인스턴트식 독서라는 평가를 받으며 자신을 과시하려는 사치라는 지적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의 텍스트 힙을 단지 오래 가지 못할 허세로만 폄하할 일은 아니다. 이유가 어찌되었든 간에 과장을 좀 하자면 출산율과 같이 떨어져가던 독서율이 오르고 짧은 쇼트 영상을 보며 핸드폰을 끼고 살던 세대들이 책을 잡게 되었다는 것은 고무적이다.

삶을 깊이 있게 다루고 취향에 있어서 누구보다도 까다로웠던 19세기 영미문학의 대표적인 작가 중 한사람인 오스카 와일드는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다. 그러나 사치만큼은 안된다’고 했다. 사치에 대한 정의는 주관적이며 다양한 물품의 소유뿐만이 아니라 태도와 행위로 볼 수 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고가의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 곧 럭셔리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오감을 통한 즐거움과 지적 성취감을 통한 경험이 될 수도 있다. 서점 안에서 책을 고를 때 느끼는 기분과 책을 사서 들고 나올 때의 기분, 그리고 책장을 넘기는 즐거움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독서 활동에 자기 과시욕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독서는 자랑할만한 그리고 장려할 만한 사치가 될 수 있다.

얼마 전 우리 집에도 텍스트 힙의 파워가 미쳤음을 실감했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중학생 아들이 난데없이 ‘인간실격’과 ‘채식주의자’가 집에 있냐고 물었다. 또래들의 영향으로 인한 지적 허세와 허영심의 발동이어도 좋다. 일단 책에 대한 호기심을 가진 것만도 기특하고 반가워 책을 찾고 함께 읽는 일이 즐거웠다. 제철 음식이 호사이듯 가을 독서만큼 힙한 사치가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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