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우승유, 이덕유와 벌인 ‘우이 당쟁’ 주역
2019년 02월 19일(화) 00:00 가가
우승유(牛僧孺, 779~847)의 자는 사암으로 현 간쑤성 금태에 해당하는 안정 순고 출신이다. 당 후기 유력 정치인으로 이덕유와 벌인 우이(牛李) 당쟁의 주역이다.
805년 진사에 급제해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우승유·이종민·황보식은 808년 실시된 책시에서 조정의 폐단을 지적했는데 시험감독관 위관지가 이들을 장원으로 선발했다. 이를 못 마땅히 여긴 재상 이길보 때문에 헌종 재위기간 중용되지 못하였다. 이를 계기로 이길보의 아들 이덕유와 오랜기간 정치적으로 갈등했다. 유명한 우이 당쟁이다. 820년 헌종이 죽고 목종이 즉위하자 이봉길이 재상에, 이덕유가 어사중승, 우승유가 호부시랑, 한유가 병부시랑으로 임명되어 당파 싸움이 본격화되었다. 추가로 재상을 선임해야 했는데 이덕유와 우승유가 유력 후보였다. 이덕유는 뛰어난 지략으로 목종의 신임이 두터웠다. 우승유는 어사중승, 호부시랑을 거쳤는데 청렴한 성품으로 평이 좋았다. 특히 선무절도사 한홍의 뇌물을 거절해 황제의 신임이 더욱 두터워졌다. 수석 재상 이봉길은 이덕유를 절서관찰사로 좌천시키고 우승유를 밀었다. 823년 봄 우승유가 재상으로 임명되었다. 목종이 죽고 유흥에만 관심있는 경종이 즉위했다. 조정은 이봉길과 실세 환관 왕수징이 좌지우지했다. 헌종 때와 같은 활력을 상실했다. 825년 무창군절도사가 되어 지방으로 내려갔다. 환관 세력과 거리를 두고 권력싸움을 피해가기 위한 교묘한 처신이었다. 경종 사후 문종이 새 황제가 되었다. 문종은 환관의 권력 행사를 못 마땅하게 생각해 환관 세력을 제거하고 국정쇄신을 단행하기를 갈망했다. 이를 위해 강단 있는 이덕유를 재상으로 발탁하려 했으나 일이 꼬여 이종민이 재상이 되었다. 우승유와 가까운 이종민은 이덕유를 정주절도사, 활주절도사로 내치고 무창절도사로 있는 우승유를 재상으로 추천했다. 환관을 제거하기 위한 문종의 계획은 측근 송신석이 모반 사건에 연류되면서 좌절되었다. 환관 왕수징은 엄벌을 요구했으나 우승유가 재상 출신 송신석이 모반을 일으킬 이유가 없다고 옹호해 개주사마로 좌천하는 선에서 사태를 마무리지었다.
결국 한림학사 이훈과 정주를 발탁해 환관 제거 계획을 추진했으니 유명한 감로지변(835)이었다. 그러나 어설픈 계획으로 거사가 실패하고 구사량 등 환관 세력은 공신을 대거 처형했다. 이로써 모든 실권이 환관에게 집중되었다. 환관이 있는 북사(北司)가 사실상 조정이었다. 회남절도사로 있던 우승유가 837년 다시 조정으로 돌아가자 이덕유가 뒤를 이었다. 이덕유는 전임자가 공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고 조정에 상주했다. 우승유도 이덕유를 반박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큰 소동없이 사건이 마무리 되었지만 양측의 갈등의 골은 더 깊어졌다. 특히 당파성이 강한 이종민이 反이덕유 입장에서 우승유를 강력히 지지하는 바람에 우이 당쟁이 더욱 심화되었다. 당 왕조 역사상 가장 긴 당쟁이었다. 이덕유는 음서를 통해 관리가 된 반면 우승유는 빈한한 가문 출신으로 진사 시험을 통해 관직에 들어왔다. 현격한 가문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 쉽게 해소될 수 없었다.
840년 무종이 즉위했다. 무종은 회남절도사 이덕유를 재상으로 발탁했다. 이덕유는 무종 재위 5년간 재상으로 있으면서 이종민, 우승유 세력을 철저히 견제했다. 그들과 친한 백거이를 재상으로 쓰려는 무종의 인사에 끝까지 반대했다. 무종 연간 우승유와 이덕유가 가장 대립한 것은 하북의 소의진 처리 문제였다. 소의진에 강경한 입장인 이덕유는 이종민과 우승유가 소의절도사 유종간에게 보낸 친필 서한을 발견하고 이를 무종에게 고자질했다. 결국 우승유는 태자소보로 이종민은 장주자사로 좌천되었다. 이종민은 이후 순주장사로 좌천되었다. 이덕유의 승리로 끝날 듯하던 우이 당쟁은 단약의 후유증으로 무종이 급서하자 급변하였다. 황숙인 광왕 이침이 선종으로 즉위하고 우승유는 중앙에 돌아와 태자소사가 되었다. 이덕유는 형남절도사로 조정을 떠난 이후 조주사마, 애주사호로 계속 좌천되었다. 우승유는 847년 69세로 낙양에서 죽었다. 시호는 문간이다.
805년 진사에 급제해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우승유·이종민·황보식은 808년 실시된 책시에서 조정의 폐단을 지적했는데 시험감독관 위관지가 이들을 장원으로 선발했다. 이를 못 마땅히 여긴 재상 이길보 때문에 헌종 재위기간 중용되지 못하였다. 이를 계기로 이길보의 아들 이덕유와 오랜기간 정치적으로 갈등했다. 유명한 우이 당쟁이다. 820년 헌종이 죽고 목종이 즉위하자 이봉길이 재상에, 이덕유가 어사중승, 우승유가 호부시랑, 한유가 병부시랑으로 임명되어 당파 싸움이 본격화되었다. 추가로 재상을 선임해야 했는데 이덕유와 우승유가 유력 후보였다. 이덕유는 뛰어난 지략으로 목종의 신임이 두터웠다. 우승유는 어사중승, 호부시랑을 거쳤는데 청렴한 성품으로 평이 좋았다. 특히 선무절도사 한홍의 뇌물을 거절해 황제의 신임이 더욱 두터워졌다. 수석 재상 이봉길은 이덕유를 절서관찰사로 좌천시키고 우승유를 밀었다. 823년 봄 우승유가 재상으로 임명되었다. 목종이 죽고 유흥에만 관심있는 경종이 즉위했다. 조정은 이봉길과 실세 환관 왕수징이 좌지우지했다. 헌종 때와 같은 활력을 상실했다. 825년 무창군절도사가 되어 지방으로 내려갔다. 환관 세력과 거리를 두고 권력싸움을 피해가기 위한 교묘한 처신이었다. 경종 사후 문종이 새 황제가 되었다. 문종은 환관의 권력 행사를 못 마땅하게 생각해 환관 세력을 제거하고 국정쇄신을 단행하기를 갈망했다. 이를 위해 강단 있는 이덕유를 재상으로 발탁하려 했으나 일이 꼬여 이종민이 재상이 되었다. 우승유와 가까운 이종민은 이덕유를 정주절도사, 활주절도사로 내치고 무창절도사로 있는 우승유를 재상으로 추천했다. 환관을 제거하기 위한 문종의 계획은 측근 송신석이 모반 사건에 연류되면서 좌절되었다. 환관 왕수징은 엄벌을 요구했으나 우승유가 재상 출신 송신석이 모반을 일으킬 이유가 없다고 옹호해 개주사마로 좌천하는 선에서 사태를 마무리지었다.